오늘 원주의 박경리뮤지엄, 옛 토지문화관을 다녀왔다. 이곳은 단순히 한 작가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박경리라는 이름을 기념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문학이 한 사람의 삶과 한 도시의 기억, 그리고 후대의 창작 환경으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박경리뮤지엄 토지문화관 전경
토지문화관은 박경리 작가가 후배 작가들을 위한 창작 지원 공간과 문화예술 현안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 조성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1999년 6월 9일 토지문화관이 개관했다. 현재도 이곳은 국내외 문인과 예술인을 위한 창작실 지원사업, 문화예술 워크숍과 세미나 공간, 박경리문학상 운영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3전시실에 소개되고 있는 연재소설로서의 '토지',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가 오윤의 삽화도 보인다.
박경리뮤지엄에서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전시를 본다’기보다 ‘한 작가가 남긴 시간 속에 들어간다’는 감각이었다. 박경리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막상 그 삶의 구체적 무게를 생각해보면 쉽게 다 설명하기 어렵다. 박경리(본명 박금이)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이후 「불신시대」,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을 통해 전후 한국 사회의 상처, 여성의 삶, 인간의 존엄과 소외를 집요하게 그려낸 작가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한국문학사에 거대한 산맥처럼 새긴 작품은 대하소설 『토지』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KBS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토지'의 자료
『토지』는 1969년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해 1994년 완간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0자 원고지 4만여 장에 이르는 대하소설이며,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 간도까지 무대를 넓혀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격변하는 한민족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작품은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 을미의병, 일제강점기, 광복에 이르는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담아낸 소설로 평가된다.

박경리뮤지엄 제2전시실, 작가가 타계하기 전까지 거주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박경리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분명해진다. 한 작가가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하나의 작품 세계를 밀고 나갔고, 그 안에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과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담아냈다. 『토지』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소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욕망, 상실, 한, 생명력, 존엄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한 집안의 몰락과 재건, 한 마을의 변화, 한 민족의 고난이 서로 얽히며 인간과 역사, 땅과 생명의 문제를 함께 묻는다.

제2전시실 내부
그는 원주에 정착해 『토지』의 후반부를 집필했고, 이후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후대의 창작 환경으로 확장했다. 원주시 자료에 따르면, 원주 단구동 자택이 택지개발구역에 포함되었을 때 토지공사 측은 ‘박경리토지문학상’ 제정을 제안했지만, 박경리 작가는 문학상보다 후배 작가들을 위한 창작 지원 공간과 문화예술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공간 조성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토지문화관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다.

방혜자 작가가 박경리에게 선물한 그림이 한편에 보인다.
이 대목에서 박경리뮤지엄은 단순한 기념관을 넘어선다. 많은 기념관이 한 인물의 업적을 보존하는 데 머문다면, 이곳은 박경리의 이름을 통해 다시 다른 작가들이 쓰고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완성된 문학’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계속 쓰이게 하는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타계한 박경리의 달력은 그대로 멈춰있다.
박경리의 거대한 문학 세계는 결국 한 사람의 일상과 고통, 그리고 집요한 생명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박경리는 ‘대작가’라는 추상적인 이름이기 전에, 긴 시간 쓰고 견디고 돌보며 살아간 사람이었다. 『토지』의 방대한 세계도 결국 한 인간이 하루하루 원고지 앞에 앉아 쌓아올린 시간의 결과다. 그 점에서 박경리뮤지엄은 문학적 성취만이 아니라, 창작 노동의 무게를 조용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건물 중앙에 거대한 화로가 있고, 대문 한쪽에는 '고양이문'이 있다. 박경리 작가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작가는 부러진 나무의자를 가지고 불상을 조각할 정도의 공예감각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동시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충분히 추천할 만하다고 느꼈다. 첫째, 박경리뮤지엄은 단순히 ‘옛날 작가를 공부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한 사람이 오랜 시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즉 오늘날 젊은 세대가 자주 고민하는 창작, 지속성, 자기만의 언어, 오래 버티는 힘을 생각해볼 수 있다. 빠른 소비와 즉각적인 반응이 익숙한 시대일수록, 26년에 걸쳐 완성된 『토지』의 존재는 오히려 강한 울림을 준다.

제1전시실 전경
둘째, 이 공간은 문학을 책으로만 접하지 않게 해준다. 박경리의 집, 토지문화관의 건물, 원주의 산자락과 조용한 풍경은 문학이 특정한 장소와 생활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젊은 관람객에게도 이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잘 몰라도, 공간을 걷고 방을 보고 작가의 흔적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문학이 훨씬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박경리 작가가 등단 이후 발표한 '당선소감'이 전시되고 있다.
셋째, 박경리뮤지엄은 지역 문화 여행지로도 설득력이 있다. 원주는 이미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로서 박경리문학상, 창작실, 문학 공간 등을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소개하고 있다. 유명 관광지만 빠르게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한 도시가 어떤 작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어떻게 현재의 문화로 이어가는지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곳은 좋은 목적지가 된다.

전시장 말미에 '죽음'에 대한 작가의 수필이 적힌 노트가 전시품으로 펼쳐져 있다.
넷째, 이곳은 젊은 창작자나 기획자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 박경리는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고, 후배 작가들이 머물며 쓸 수 있는 공간을 남겼다. 이는 예술가의 성취가 개인의 영광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환경과 제도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학, 전시, 출판, 지역문화, 아카이브에 관심 있는 젊은 세대라면 이 점에서 박경리뮤지엄을 단순한 문학관 이상으로 읽을 수 있다.

26년에 걸쳐 『토지』를 완성한 작가,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을 수많은 인물의 삶으로 형상화한 작가, 자신의 성취를 후배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되돌려준 작가. 그런 점에서 박경리는 단지 한 시대의 소설가가 아니라, 한국문학이 역사와 인간, 생명과 장소를 어떻게 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거대한 이름이었다.
전시는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안에 담긴 문학의 무게는 무거웠다. 원주의 산자락과 토지문화관의 공간, 그리고 박경리라는 이름이 오래 함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