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 옥계에서 태어나 원주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김진열 작가의 삶과 작업, 그리고 40여 년에 걸친 기록을 함께 조명하는 아카이브 전시《김진열 아카이브: 일어나다, 받들다, 보듬다》가 원주 치악예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작품 50여 점과 사진, 글, 작가 노트, 전시자료 등 기록물 100여 점을 통해 한 작가의 예술이 어떤 장소와 시간, 사람과 사건 속에서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치악예술관 전경
전시는 2026년 7월 1일부터 7월 4일까지 치악예술관에서 진행되고, 이후 7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서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으로 이어진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주최·주관하고, 강원특별자치도와 강원문화재단이 후원한다.

아카이브 섹션 전경
김진열 작가는 1952년 강원도 강릉 옥계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이후 회화, 드로잉, 입체, 설치, 시민미술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해 왔고, 2017년 제2회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은 흔히 ‘민중’, ‘형상’, ‘지역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이번 전시는 그보다 넓은 자리에서 김진열의 예술을 바라보고자 한다. 인간과 자연, 노동과 생활, 물질과 기억이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그의 작업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장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

전시장 안에는 작가가 창작을 위해 사용한 다양한 재료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김진열의 작품에는 투박한 노동의 몸, 비극미를 품은 인물, 자연의 은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무, 녹슨 금속과 종이의 두터운 표면이 등장한다. 거칠게 덧대어진 물질의 표면과 어두운 색조는 고난의 시간을 암시하지만, 그 안에는 다시 일어서려는 힘과 회복의 가능성도 함께 놓여 있다. 작가의 작품은 고통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삶의 무게를 견디는 존재들 안의 ‘존엄’을 발견해 낸 결과이다.

작가 인터뷰 영상
전시 제목인 “일어나다, 받들다, 보듬다”는 원주의 생명운동가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말 “기어라, 모셔라, 함께하라”를 변주한 것이다. 낮은 자세로 세계를 바라보고, 생명을 받들며,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라는 이 태도는 김진열의 예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김진열은 1986년 원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 원주의 민주화운동, 협동조합운동, 생명운동의 흐름 속에서 사람과 자연, 노동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더욱 깊게 형성해 왔다.
이번 전시는 여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섹션 〈옥계, 수평선의 기억〉은 김진열의 감각이 시작된 강릉 옥계의 장소성을 다룬다. 어린 시절 자두나무에 올라 바라보던 바다와 수평선, 하천과 습지, 광포의 물길은 이후 작가의 작업에서 생명, 순환, 회복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1981년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자르기〉가 전시되었다.
두 번째 섹션 〈출발, 세련됨의 바깥에서〉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작가가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검열과 억압의 시대를 지나며 김진열은 매끈한 화면보다 자르고, 찢고, 붙이고, 덧대는 방식으로 시대의 압력과 인간의 상처를 물질의 언어로 드러냈다.

1991년 무위당 장일순이 김진열 작가에게 선물한 부채 그림이 전시되었다. 선종의 '반야심경' 구절을 인용한 글귀가 적혀있다.
세 번째 섹션 〈원주, 생명과 사람의 자리〉는 1986년 원주 정착 이후 작가의 예술이 생명문화와 공동체의 문제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주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 협동조합운동, 생명운동이 함께 전개된 지역이다. 이 사상적 분위기는 김진열이 인간과 자연, 노동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네 번째 섹션 〈일꾼의 시간, 작가의 하루〉는 작업실 바깥의 생활과 노동을 조명한다. 작가는 교육자로서, 환경 운동가로서 시간을 보내는 한편, 일상에서는 원주의 땅을 오랜 시간 일구었다. 그에게 밭일은 몸으로 자연의 시간에 들어가는 일이자, 자신을 확인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수행적 시간이었다. 가족 사진과 생활 기록, 작업실 자료들은 그의 예술이 삶과 분리된 창작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낸 시간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섹션 〈전시의 기록, 지속의 궤적〉은 방명록, 리플릿, 기록 사진 등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김진열의 전시 활동을 살펴본다. 40여 년에 걸친 자료는 작가가 시대와 공간, 사람과 자연을 향해 던져 온 질문의 흔적이다. 아카이브는 작품을 둘러싼 시간의 결을 보존하며, 작품이 놓였던 상황과 그때의 감각을 다시 불러낸다.

전시전경
여섯 번째 섹션 〈작품세계, 고난과 희망의 형상〉은 김진열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철판, 종이, 버려진 노트, 편지, 녹슨 금속 등 다양한 물질은 작가의 손을 거쳐 얼굴과 몸, 나무와 사물의 형상으로 변해 간다. 특히 녹슨 철판은 시간의 흔적과 물질의 변화,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감각을 드러내는 중요한 조형 요소이다.

전시장 출구
전시장 마지막에는 작가의 문장 하나가 놓여 있다. “일정한 톤으로 보행을 지속하는 보속이 참으로 뜻밖의 결과를 내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가 있다.”
이 말은 빠른 성취보다 오래 걷는 시간, 반복되는 행위, 지속되는 태도 속에서 형성되어 온 김진열의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통제되는 기계화된 문명 속에서도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몸의 리듬, 유한한 육체 안에 깃든 감각과 영성이 그의 작업 안에 남아 있다.

라운드테이블 전경
7월 1일 원주 치악예술관에서는 전시 개막행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오후 3시부터 4시 30분까지 김진열 작가와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라운드테이블이 열렸고, 이어 오후 5시부터 5시 30분까지 개막행사가 진행되었다.

싱어송라이터 윤희영(활동명 onjeon)의 축하공연
개막행사는 사회자 인사, 축사, 전시 소감, 축하공연 순으로 이어졌다.

개막식 단체사진
《김진열 아카이브: 일어나다, 받들다, 보듬다》는 한 작가의 작품만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다. 강릉 옥계의 유년 기억, 원주의 생명사상, 가족과 노동, 시민미술운동, 그리고 40여 년의 전시 기록이 함께 놓인 자리이다. 작품과 기록을 통해 김진열의 예술이 어떻게 삶의 시간과 관계 맺고, 인간과 자연, 물질과 기억을 함께 보듬어 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