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보는 현재의 거울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정기는 수년간 중요한 전시를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 배경에 대해 밝혀왔다. 작가의 주장이 작품과 반드시 일치된다고 할 수는 없어도 양자는 수렴을 향한다. 의식적 주장 만큼이나 행간의 무의식도 중요하다. 그가 ‘미술작업을 할 때 주의하고 경계하는 부분은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고 분위기에 편승하여 작업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는 사회에 관심이 많다. 우선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던 지역에서 자랐다는 점도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그의 집안은 시대와의 관계 속에서 부침이 있었다. 역사를 먼 일로 바라볼 수 없는 개인사가 있다. 역사, 특히 고난을 헤치고 나아가는 민중에 대한 관심이 드높았던 때는 1980년대다. 94학번인 이정기가 청년기를 보내던 시절은 현실 참여를 비롯한 여러 사회정치적 경향이 보다 활발해진 때이기도 했다. 70-80년대(그 이전에도)는 너무나 엄혹한 시기여서, 대개 문화예술은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생산되고 소진됐다.
전시 전경, 시대의 유물 연작 (이하 모든 사진의 출전은 ACC)
80년대의 대표적인 저항예술로 평가받는 민중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역사적인 전시를 한 것도 90년대 들어서이다. 90년대는 직접적 표현을 넘어서 저마다의 다양한 언어로 현실을 이야기했다. 작가란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우선은 현실이 중요한 작품 소재로 소통의 계기를 준다는 점이 그렇다. 그저 선택하는 소비는 가볍고 선택되기 위한 생산은 무겁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비대칭이 존재하며, 모든 생산자는 이를 뛰어넘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 생산자의 시각은 보다 예리하고 집요할 수밖에 없다. 창조적 작업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작가란 이러한 상황을 운명까지는 아니어도 작업 내부에 포함시킨다. 그들의 타자적 위치는 삶의 진실을 더욱 잘 보게 한다. 물론 허위의식이나 이데올로기의 공세가 있지만, 생산하는 자는 생산되는 과정 또한 간파하기 마련이다. 타자가 가지는 삶과의 괴리 또는 거리감은 단순한 소외나 패배 의식을 넘어선다.
예술의 조건이자 결과인 이러한 간극은 양날의 칼이어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게하기도 하고 현실도피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 거리 안에서 삶의 진실이든 예술형식의 실험이든 가능하다. 예술은 삶이 아니며, 삶의 단순한 반영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삶과 평행하게 존재하면서 때로는 만나고 때로는 이탈하면서 상호작용 한다. 이정기가 자신은 물론 가족을 비롯한 지인을 작업에 끌어들이면서도 역사적 유물처럼 다루는 방식은 현실과 예술의 관계 그 자체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예술적 거리는 역사나 고고학적 상상력을 통해 대폭 확장된다. 그 거리감 속에서 현실은 다양한 면이 들추어진다. 아내 뱃속의 아이부터 가족과 지인들까지 모두 역사적 상상력의 대상이 되어 조각난 거울부터 데드 마스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구현된다. ‘ACC 뉴스트 작가 공모전’의 첫 주자인 이정기의 [번역된 가상] 전은 그동안의 대표 연작들에서 뽑은 것으로, 2000년 첫 개인전을 포함하여 30여년 이어온 그의 작품 세계를 축약한다.
전시 전경, 현대인 연작
크게 다섯 부문으로 나눌 수 있는 작품군이 40여 평의 전시 공간을 채웠다. 지인의 상이 등장하는 인간화석, 가족상이 등장하는 시대 유물, 현시대를 보는 작가의 경고가 담긴 메시지, 돼지 저금통으로 상징될 수 있는 기능을 잃은 사물, 그리고 20여년 전의 거울 작업들이 그것이다. 각 시리즈는 각자의 서사가 있지만, 서로 연동되어 ‘번역된 가상’을 구성한다. 전시 키워드로 제시된 ‘번역’도, ‘가상’도 직접성이 배제되는데, 이는 물자체에 대한 관념과 달리, 정보화 시대에는 무엇이든 간접적으로 매개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희귀한 유물] 연작을 담은 작품 등, 영상 및 설치 작업도 있지만, 회화가 주를 이룬다. 이정기의 원래 전공인 회화는 여러 매체를 보다 자유롭게 수렴하고 종합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번역된 가상들’은 현대사를 그의 관점으로 번역한 것으로, 미래에 현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고학적 상상력이 담겼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대학 4학년 때 한 첫 개인전(2000년) 때부터이다.
94학번으로 문민정부 시절 대학을 다닌 그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를 비롯해서 결국 세월호 사건까지 이어진, 대형 사고가 빈발한 시대에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하게 됐다. 대학 때 미술계의 지배적 방향인 사회참여파와 모노크롬 화파와 동일시하기 힘들었다. 양대 흐름은 동일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하나는 예술의 자율성, 다른 하나는 역사의 주체(민족, 민중 등) 같은 주제이다. 그들은 각자의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진보의 방향을 확신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는 화단정치에도 그대로 발현됐다. 필요한 것은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사회와 역사를 적절히 담아낼 형식이다. 그는 ‘유물’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현재는 다양한 매체로 기록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물질로써의 유물보다는 사유하고 사고하는 성찰로써의 유물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작품 기조를 ‘오늘날을 성찰적으로 반추하는 유물’(2023)로 설정한다.
위기의 가능성_사자의 서 2023~2026 cement mortar 가변적 설치 (위기의 가능성 연작)
중요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대에 유물로 남는 문제는 역설적으로 더 엄중한 기준이 작동될 수 있다. 왕과 귀족 같은 지배계급의 무덤 유물이 아니라, 서민들의 일상 기록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아날학파의 전략은 삼시세끼 먹은 것도 영상으로 올려 소통하는 현재 문화의 경향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한편 본인의 작품이 예술작품을 넘어서 유물로 남는다면 그것은 굉장한 영광일 것이다. 멀고 큰 역사가 아닌 가깝고 미시적인 역사에 대한 관심은 격동의 시기인 80년대를 지나면서, 1990년대는 ‘다원주의’라는 깃발로 그동안의 화단 정치에 의해 가려지고 억압됐던 다양한 흐름이 가시화됐다. 이정기에게 가족관계가 작업에 들어오게 된 것은 2016년 [시대의 유물; 기록] 전 때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1933년생으로 7형제 중 4형제가 한국 전쟁 중에 죽었다. 할머니는 도시 개발 과정에서, 6형제 중 막내인 본인도 IMF 때 큰형을 잃었다.
고도로 발전 중인 사회에 닥친 경제 위기 여파로 유명을 달리한 큰형은 작업하며 살아가는 그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저보다 9살 많은 큰형은 미술대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세상을 그려내는 큰형의 어깨너머로 본 그림은 저에게 미술에 대한 동경을 심어 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입시 원서조차 못 낸 형의 희생으로 그는 미술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는 미술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형에 대한 부채 의식 또한 그의 트라우마 항목에 자리한다. [시대의 유물: 기록] 전은 ‘가족의 죽음과 개인사를 작업으로 풀어내어 지금껏 나로 하여금 불편하게 했던 과거와 관념을 씻어 내고자 했던 전시였다’고 회고하면서, ‘가족사에 대한 억압된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기적인 태도가 잠재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정신분석학은 반복을 통해 예견된 위험을 회피하려는 기제를 말한다. 작품을 통한 상처의 반복은 다시 상처받지 않겠다는, 또는 치명상을 피하겠다는 예방적 행위로 해석된다.
시대의 유물_ 수면1 2015 거울 104.5×90cm
가장 풍파가 심한 세대는 아버지였지만 이정기 또한 ‘가지 많은 나무’의 상황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는 ‘현재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부모이며, 사회의 기성세대가 되어 있다는 사실’(2023)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느낀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N포 세대’로 알려진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그의 작업 기저에 깔리게 된다. 아마도 대가족과 거리를 두는 현시대의 추세가 자신의 삶을 역사와 중첩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가족 관계에 얽힌 작가의 모습은 기능을 잃은 돼지 저금통이 작품 소재로 들어온 것과 비슷하다. 그동안 작품에도 등장했던 만삭 아내 모습은 얼마 전 태어난 넷째 아이까지도 적용된다, 라이프 캐스팅된 둥근 배는 미래와 현재가 교차되는 지점이다. 그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은유라는 우회적 어법으로 시대의 어지러운 굴곡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자의식을 담는다. ‘시대의 유물’ 연작은 혈연관계를 가진 인물의 초상조각상을 유화로 그려 나란히 걸었다.
작품 [남녀노소_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관계](2022)는 초상조각상을 다시 유화로 그린 것으로 미술 내 형식에서 여러 번 번역한 상태다. 먼 훗날 유물로 나타났을 때도 그것은 번역되어야 한다. 역사는 그자체로 객관적인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자체가 거듭되는 해석의 역사다. 이정기가 역사적 자료로 간주하는 것은 객관적인가?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역사적 자료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동의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역사가에게도 예술가 같은 상상력은 필수다. ‘역사가는 직접적인 관찰의 결과로 얻어낸 동떨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그의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시인과 달리 역사가는 순수한 환상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대신 결합능력이 필요하다.’(헤이든 화이트) 역사와 예술의 관계는 무미건조한 실증주의를 비판한 철학자의 심미주의적 관점에서 적절하게 제시된다,
사물의 풍경2 2026 cement mortar 70.5×86×163cm
‘훌륭한 역사가는 알려져 있는 사실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사실로 만든다’(니체) 철학도 과학도 아닌 예술의 맥락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은 이정기의 고고학적 작품을 이해하는데 참조점을 제공한다. 니체의 경우 ‘역사의 장이 개념화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를 창조하는 무대로 간주’(헤이든 화이트) 된다. 철학자 알렉산더 네하메스는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에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인용한다. ‘세계에 대한 반형이상학적 관점, 그렇다 단지 예술적인 관점’에 의하면 ‘세계란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는 작품이다’ 네하메스에 의하면 니체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계는 물자체나 고안물이 아니라, 외적인 원인과 인간의 해석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공동의 창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는 세계의 현상과 본질을 구별할만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니체) 때문이다. 네하메스는 ‘나는 해석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사실은 없으며, 따라서 모든 해석의 공통된 해석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네하메스에 의하면 어떤 견해가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오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견해가 다른 모든 견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목적을 위한 특정한 이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정기가 활용하는 여러 양식 중에서 회화는 의도한 형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작품 [남녀노소_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관계]는 네 명의 인물이 조각된 가상의 돌 조각상이 존재하고, 이런 가상의 형상을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바라보는 그림 2점이다. 작품 [시대의 유물을 보다_아버지](2021)는 우리 근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80대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유화 버전은 현실의 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돌아가셔서 미리 제작 해놓은 작업은 더욱 필연성을 띄게 됐다. [시대의 유물을 보다_어머니](2019)는 고단한 세월을 살아왔을 80대 모친의 초상이 굳게 다문 눈과 입으로 표현됐다. 어머니의 파마 머리카락은 쥴리앙의 초상조각 표현을 차용했다.
사물의 등치2 2025 oil on canvas 145.5×97cm
이작품은 모노톤으로 그려진 초상화의 성격을 보여주며, 모든 초상이 부재의 현전임도 말해준다. 세세한 초상의 재현에 사진적 과정이 포함된다. 사진은 죽음과의 관계는 많이 지적되어 왔다. [사진론]의 저자이기도 한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카메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말 그대로 렌즈 앞에 놓인 그 무엇인가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사진은 사라져 간 과거와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게 해주는데 있어 어떤 그림보다도 탁월했다.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해 그 죽음을 영원히 잊혀 지지 않게 만드는 일은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수전 손택) 이정기의 [미필적 고의] 전(2023)의 한 주제인 ‘부재’는 ‘죽음과 이별에 대한 슬픔이 일상에 스며있음으로 해서 마주하는 상실감’을 말한다. 초상화-초상사진도-의 출발에 부재가 깔려있다. 실제를 대신하는 이미지 자체가 부재의 현전이다.
이는 신화와 종교의 시대를 거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러 형식의 초상은 ‘가족들의 죽음과 이별의 개인적 서사가 들어 있었다. 살아있는 유물로’ 나타난다. 개인사지만 보편사와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기에 작품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 근대사는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시켰던 압축된 성장일지. 발전은 모순과 갈등이 점철되고 육체적, 심리적 희생자가 다수 발생되는 과정이었다. 서구의 근대화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외부 식민지를 통해 자원, 노동, 시장 등을 수급해 가며 내부의 모순을 완화시켰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대열에 든 한국 또한 안팎의 희생자를 전제한다. 한 시대에 민중이나 민족이라고도 불려졌을 주체는 그에게 가족과도 겹친다. 가족은 역사라는 대 담론을 나의 문제로 끌어들이는 매개가 된다. ‘살아있는 유물’이란 역설적 표현이다. 은행나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생물학적 개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남녀노소_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관계 2022 Oil on canvas 193.9×122.2cm (2)
만들어진 지 오래된 어떤 예술작품이 현재에도 성공적으로 소통될 때 그 또한 살아있는 유물의 대열에 속한다. [현재인] 연작은 마치 고대 폼페이 화산의 폭발의 유적처럼 나란히 걸려있다. 이정기의 관점에서 그들은 현대인이 아닌 ‘현재인’이다. 그것은 현재가 미래에 의해 급격하게 침식되는 현대에 대한 단상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었고, 죽자마자 유물이 되었다. 현재인 연작은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본인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현재인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사회에서 적응력을 실험 받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살아있는 인간을 화석처럼 표현한 가상은 인간의 위상이 이전 같지 않은 시대를 상징한다. ‘화석화 되다’라는 일상적 표현이 있듯이 그의 작품은 인간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화석화한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여전히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인간 같지 않다.
AI를 탑재한 피지컬 로봇이 인간의 중요한 속성인 노동을 대체해 가는 ‘미증유’의 시대는 ‘인간의 죽음’을 선고한 20세기의 미셀 푸코의 경고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위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현대성에서 현재의 의미’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에 의하면 모더니티는 미래의 몫이 압도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지나간 미래]는 ‘역사’라는 집합개념을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역사화 한다. 코젤렉은 역사주의가 등장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짚어낸다. ‘18세기 이후의 역사서술에서 새로운 시대라는 개념이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의식에 의해 근대는 과거 전체에 세계사적 성격을 부여한다. 당시의 새로운 낱말들 중 하나인 시대정신은 현재를 과도기로써 특징 짓는데, 이 과도기는 과정에 속도가 더 붙을 것이라는 가속화의 의식과 미래가 전혀 다른 종류일 것이라는 기대 속에 소모된다.’
시대의 유물을 보다_아버지 2021 Oil on canvas 193.9×122.2cm
코젤렉은 어떠한 시간이 새로운 시대로, 즉 ‘근대’로 경험될수록 미래의 도전은 점점 더 커졌다고 말한다. 이질적 경험을 생산하는 시간 간격의 단축이나 경험들을 소진시키는 변화의 가속은 근대를 특징 짓게 되었다. 미래의 세계는 현재나 과거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리라는 확신 속에서 미래의 몫이 불균형적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이정기가 현대성에서 현재의 의미를 생각할 때 미래에 침식된 현재이며 암울하게도 그의 미래는 유토피아적 전망이 아닌 죽음이다. [현재인](2024) 시리즈는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색감이 다르게 그려졌다. 캔버스는 마스크같은 초상을 안치한 상자 같은 역할도 한다. 재현주의에 충실한 그림은 무엇인가를 눈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동시에 붓 터치가 드러난 거칠거칠한 표면은 그러한 투명 상자의 역할을 의문시한다. 아무것도 없는 배경의 붓 자국에 내재된 시간성, 물성, 육체성은 죽음을 맥락화 한다.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스크같은 초상은 시간의 의미를 강조한다. 돼지 저금통을 소재로 한 작품군은 조각, 설치, 회화의 형태로 확장된다. 그는 해석돼야 할 유물을 형식 간에도 적용한다. 형식1에서 형식2로 바뀔 때 생략된 것과 드러난 것이 생겨난다. 문자가 새겨진 작품도 있지만, 평면 양식은 입체 보다 세세히 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림은 텍스트와 보다 가깝다. 거울 조각들이 입혀진 저금통은 어두운 벽에 난반사한다. 기능을 잃은 물건이 예술이나 골동품이 되어 조명을 받는다. 깨진 거울 조각은 거울 자체에 내재된 균열을 더욱 분명히 한다. 심리학에서 사회적 요구를 담아내는 거울은 분열된 자아가 가상적으로 종합되는 장으로 간주된다. 이정기의 작품에서 그러한 종합은 견고하지 않다. [사물의 풍경](2024) 시리즈에서 시멘트를 재료로 만든 돼지저금통의 입체 형상은 발굴될 유물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맨 위는 그것이 사라진 세월만큼의 흙이 덮여 잡초가 무성하다.
시대의 유물을 보다_어머니(광주시립미술관 소장) 2019 Oil on canvas 193.9×122.2cm
그는 ‘사물의 풍경’ 연작에서 돼지저금통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상징과 한 세대가 후세에 남기게 되는 유물의 의미’를 가지며, ‘저금통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사라진 돼지저금통 모형은 한 시대의 허구적 유물이라는 가상성을 내포 한다’고 말한다. 이정기가 선택한 돼지 저금통은 이제 그 용처가 사라진 물건 중 하나다. 부피가 커서 문방구 입구에 크기별로 줄지어 걸어놨던 그 빨간 플라스틱 저금통은 문방구와 더불어 사라지고 있다. 그 안에 차곡차곡 모였을 손때 묻은 동전도 마찬가지다. 교환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말한다. 금본위제가 무너진 후 가상적 차원이 증대된 지불방식이 대표적이다. 자본의 방식은 변화무쌍하게 변하지만, 그에 상응할 노동의 가치는 모호하다. 보수/진보를 나누었던 자본/노동 간의 근본적 모순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변화는 물물교환 이래 가치가 추상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돈 자체가 추상적 체계이다. 추상미술은 미술 자체의 내재적 논리의 발현만으로 볼 수는 없다. 지불방식의 지배력을 위한 세계화된 차원에서의 경쟁과 전쟁은 또 하나의 위험과 긴장 요소가 되고 있다. 그는 저금통을 시멘트로 만들어 실내나 실외에 설치하고 그것을 다른 작품에서 그림으로 번역한다. 발굴된 사물 사이사이에 돌이 배치된 2024년 작품은 흙보다 더 많은 시간을 쌓아온 사물로 다가온다. [사물의 등치](2025) 시리즈는 돼지저금통이 그 현실적 기능을 잃고 유물로 발굴된 가상적 상황을 유화로 표현했다. 유물 버전의 사물은 빨간 플라스틱으로 얇게 만들어진 원래의 돼지 저금통 보다 실재감이 있게 연출되어 있다. 그의 저금통은 돌처럼 묵직하다. 생물의 화석에도 원래의 유기물질이 무기물질로 치환된 경우가 있다. 그만큼의 긴 세월의 흔적이다. 교환가치가 지배적인 현대사회에서 상품은 코드이기도 한데, 코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사물화 된다.
현재인1 2024 oil on canvas 116.8×91cm
그것은 한때의 생활용기가 진열장 안에 안치되는 것과 마찬가지 과정이다. 당대에 흔한 것일수록 진귀한 것이 된다. 전시장 벽에 붙인 ‘사자의 서’에는 ‘전쟁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는 광주 신세계미술제 수상작가 초대전인 [미필적 고의](2023) 전에서 경험하지 못한 전쟁의 비극을 표상적으로 담아낸 작품 [위기의 가능성]을 발표한 바 있다. 휴전 이후 한반도에서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매일 세계 곳곳의 전쟁 소식을 들으며, 간접적인 영향권에 속해있다. 그의 전시 기간 중에 터진 중동에서의 전쟁은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가 ‘독재자가 영구 집권하는 구조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전쟁을 그대로 재현한다. 지금도 끝나지 전쟁은 독재자가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계속 일으킨 광기를 보여준다. 얼마 전 한국에서도 분단 상황을 이용한 도발로 국민은 기만하려 한 어리석은 정치인이 있었다.
현대는 구조적으로 움직이지만, 그만큼 우발적인 원인의 파장은 클 수 있다. 전쟁을 결정하는 것도 죽는 이도 사람들이다. 거대 자본은 파괴를 통해 이익을 얻고 그러한 기대치가 파괴를 부추긴다. 전쟁에 의해 무고한 사람은 죽어 나가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이익이 되는 사업이 된 지 오래다. 시스템을 바탕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가 보다 명확해지고 있는 시대에 여전히 거시적 관점은 필요하다. 또 다른 ‘사자의 서’에는 전시부제를 돌에 새겼다. 모든 것이 코드화되어 만들어지고 지워지는 정보사회에서 마치 반석 위에 새겨진 계율 같은 모습으로 연출했다. [위기의 가능성_사자의 서](2023~2026)는 죽음의 형식을 통해 현시대를 위기로 보는 관점을 표현한다. 전시부제가 새겨진 돌은 아직 반듯함이 유지된 상태지만, 벽에 걸린 사자의 서는 시간의 흔적 담고 있어 닳거나 깨진 모서리를 보여준다. 가장 초창기 작업은 [시대의 유물_ 수면1](2015)에서 촘촘하게 맞춰진 퍼즐 같은 거울조각들은 깨진 상태인지 붙는 상태인지 불확실하다. 그의 거울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구성한다.
현재인6 2024 oil on canvas 116.8×91cm
지금의 우리를 해석하는 미래인의 시각 또한 유동적이다. 이정기가 고려하는 미증유의 사태는 미래라는 개념조차 불확실하게 만든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개념보다 이미 와있는 미래도 있고 잠재력을 가진 과거도 있으며, 의식되지 않은 현재도 있다. 예술은 이러한 복합적 시간의 매트릭스에서 길항작용을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가 가졌던 예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아니다. 과도한 기대는 예술자체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포기하게 하는 역설을 낳기도 했다. 요컨대 일부 아방가르드는 ‘예술’을 혐오했다. 끝없이 선언됐던 ‘예술의 죽음’. 하지만 예술은 소수의 선언만으로 끝낼 수 없다. 제도와도 큰 상관이 없다. 자신의 삶과 함께 하고자 하는 내적 필연성이 있는 이들에 의해 예술은 지속된다. 사회와 역사에 관련되면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파 하는 작가의 고민은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현재를 현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유물이라는 방식을 통해 거리를 둔다.
이는 예술의 거리두기 방식과도 교차 된다. 2018년 광주 신세계미술제의 전시에서 그는 신입생 때 겪은 한국 사회의 취약한 부분이 분출된 사건 사고들에 주목한다. 대중들은 재난 소식에 무감각해진 상태이다. 그 점이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진다. 미디어는 사건을 소비재로 인식한다.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집중 투여되는 작업은 소비가 아닌 생산의 차원에 속한다. 작가는 사건의 충격만큼이나 그것이 소비되고 급격히 사라지는 현실에 대해 주목한다. 관심 집중이 곧 돈이 되는 세상에서 AI를 활용한 날조 또한 미디어의 정보 소비에 해당된다. 그는 ‘과거에 실재했거나, 실재하지 않았지만 실재하는 것 같은 상황을 가상으로 연출하여 보여준다. 작품은 유물의 형태로 표현 되었지만, 날조된 가짜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역사적 유물이라는 형식을 한번 거침으로서 기록된 사실을 메타적인 차원으로. 가상의 조각을 회화의 형식으로 다시 그린다든가 하는 차원의 변주 또한 그렇다. 그의 작업은 예술 또한 거듭되는 번역 작업의 결과인 현실의 일부가 됨을 보여준다.
출전;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