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문을 여는 연결망
이선영(미술평론가)
김경선이 붓과 물감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바늘과 실은 존재보다는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개별적인 형태보다는 어떻게 이어지는가가 중요하다. 그의 관심은 ‘형태 자체보다 시간과 관계가 어떻게 공간으로 확장되고, 서로 다른 존재와 시간이 어떻게 연결되는가’이다. 그는 ‘관계가 존재를 만든다’고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복잡하게 얽힌 모습을 통해서 미시와 거시 세계 모두에 관철되는 역동성을 표현한다. 실로 이어진 작품은 그물망적(web-based) 세계를 보여준다. A.L. 바라바시는 『링크』에서 생물학적 존재, 사회적 세계, 경제, 그리고 종교적 전통들은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서, 이제는 일상화된 링크의 의미를 강조한다. 연결망의 세계는 ‘그 위상구조를 조금만 바꿔도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문을 열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고도로 상호연결된 삶의 그물망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배제되어 있지 않다.’(바라바시).
실마리 I_노란 관계망, 55.5 x 43.5 cm, Mixed media, 2026 (10호)
그의 우주에서 시작과 끝은 모호하다. 작가는 중간부터 시작하며 중간에서 결을 늘려나간다. 헌 옷으로부터 나온 천을 활용하는 작품의 공간 관계는 복잡하며, 작가가 정한 구성 요소들의 배치와 간격을 조정하여 관계를 늘려나간다. ‘중요한 것은 점과 점 사이의 간격이다. 그 간격은 비어 있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기다림과 기억, 부재와 움직임, 그리고 시간이 머문다. 내 작업에서 점선은 정적인 선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는 선이다.’ 바늘땀이 드러나는 실의 궤적은 표면 뒤로 들어가는 구멍부터 표면 위에 입체화되어 붙은 요소들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면서 ‘다층적 구조’를 만든다. 왁구 옆면을 비롯하여 공간의 모든 구석들이 탐사된다. 만물의 코드화가 진행된 이래 물질적 밀도를 높여가며 의미를 생성, 변형시키는 것은 예술의 기본 전략이 됐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되는 그의 작품은 존재로부터 관계가 발생하는 지점도 있고, 양자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넘어옴에 따라 존재가 관계에 비해 약화된다. 많은 부분이 코드화되어 가는 시대에 존재나 실재 같은 표현 자체가 회피된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형이상학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소통이든 유통이든 현실화되지 못한 잔여의 몫은 있기 마련이며, 이 시공간이 바로 예술의 자리다. 발전이나 진보에 대한 신념이 무너진 현재, 최전선이라는 방향성과 관계되는 전위라는 개념도 무색해졌지만, 미지의 것을 다루는 예술은 여전히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에 호소한다. 그것은 대중뿐 아니라 작가와 작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가 스스로 의식화되지 못했던 것들이 작업에 몰입하면서 서서히 분명해진다. 작업은 명확한 의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아직 코드화되지 못한 것이 잠재적인 것이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것이 실재나 존재, 본질 등으로 간주된다. 현실화되면 의미와 가치가 매겨지며, 곧장 유통의 회로에 진입하게 된다.
실마리 II_빨간 관계망, 72.7 x 53 cm, Mixed media, 2026 (20호)
실마리 III_파란 관계망, 55 x 43 cm, Mixed media, 2026 (10호)
하지만 유통이 곧 소통은 아니다. 사회적 관계 등을 생각해 보면, 결국 주변부에서 고독하게 작업하는 예술가는 관계보다 존재가 더 친근하다. 누군가, 또는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상황이 자유롭지만은 않다. 하지만 관계망이 단절되어 그저 존재만 하고 있다면 이는 죽음과 다를 바 없다. 경제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은 실제로 죽기 수십 년 전에 그의 주된 일에서 떨려 나와 사회적으로 사라진다. 김경선의 작품은 크지 않아도 주변은 환하게 밝히는 것 같은 느낌과 밀도를 가졌다는 점에서 존재감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만든 복잡한 연결망에 의한 것이다. 여러 층과 겹을 이룬 관계망들은 복잡할수록 경이롭다. 그가 최근 작품에 주로 사용하는 블루진 천은 누군가 이미 사용한 자체의 역사를 가지는데, 이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한 그의 작품은 천이 오리기, 겹치기, 다시 잇기가 가능한 유연한 매체라는 점을 활용한다. 유연한 공간은 그에 상응하는 시간을 전제한다.
그는 이 재료에 대해 ‘블루진은 단순한 천이 아니라 타인의 삶과 노동을 품은 시간의 기록물’로 생각한다. 블루진의 해체 재구성은 ‘이미 존재했던 관계를 풀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천과 실, 그리고 바늘로 만들어지는 작품은 구겨지고 접혀지고 오려지며 다시 연결되는 시공간에 대한 비유이다. 무언가를 그대로 재현하는 작품이 화폭을 일종의 상자(대상을 그대로 담아내는)처럼 사용한다면, 김경선의 작품은 ‘상자’ 자체를 또 다른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중성적 용기(用器)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사건의 시공간이다. 질 들뢰즈와 리좀적 사고를 공유한 펠릭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말하듯이, 공간과 시간은 결코 중립적인 그릇이 아니다. ‘공간과 시간은 노래, 춤, 조상들과 신들에 대한 이야기 등을 포함하는 주체성의 생산’(가타리)이다. 어디선가 취해온 사물의 단편을 잇는 자는 그만큼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작업은 작가의 재탄생이며, 작품 또한 관객을 만들 것이다.
얽힘의 결, 75.7 x 56 cm, Mixed media, 2026 (20호)
시간의 궤적, 75.7 x 55.7 cm, Mixed media, 2026 (20호)
김경선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꿰매지고, 겹쳐지고, 접속되고, 다시 발생한다. 그리하여 내 작업에서 시간은 선형적인 흐름에서 관계망으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사용된 물건으로부터 출발하는 작품은 시작점이 불확실하며 목적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남의 옷을 고쳐 다른 옷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쓸모(기능)가 사라진 이후에 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선이라는 개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흐름 그 자체에 몰입한다. 작가는 연결 과정을 늘려나가는 유희를 행한다. 작업은 단지 줄 하나하나를 첨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기존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는 과정이다. 나아갈 길은 그때그때 정해진다. 요컨대 김경선은 ‘리좀적’으로 사유한다. ‘하나의 점은 다른 점과 연결되고, 점선은 또 다른 점선과 만나며, 서로 다른 블루진의 조각들이 접속하고, 원은 다시 다른 층위로 이동하는 통로가 되는 작품은 리좀(rhizome)적 사유와 연결’된다.
이전에 그는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설치 작업에 몰두했다. 이제 그의 작품은 설치물이 사각형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차원의 이동이 일어났다. 설치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축소 모형으로 재구성된 느낌이다. 큰 방을 얇은 상자로 압축한 셈이다. 카프카의 『변신』처럼 상상으로 몸을 줄인다면 그곳은 여러 길이 복잡하게 뻗어 있는 미로의 우주로 다가올 것이다. 이제 그는 유목민처럼 자기 작품을 들고 이동도 가능하다. 물론 그의 사각형은 캔버스 그림의 사각형은 아니다. 작품 표면은 구멍이 뚫리고 바느질로 이루어진 선은 안팎으로 이어지며, 뭔가 매듭지은 실마리는 감춰지지 않고 또 다른 점으로 나타난다. 기하학적인 점이 아니라 작은 덩어리들이다. 그의 작품이 유기체적이라면 그 기본 단위는 원이다. 크고 작은, 패여 있거나 도드라지는 원이다. 매듭지어짐과 동시에 또 다른 출발점이 되곤 하는 실마리들 또한 원으로 보인다.
순환의 장, 72.7 x 53 cm, Mixed media, 2026 (20호)
순환의 접속, 72.5 x 52.7 cm, Mixed media, 2026 (20호)
김경선은 자신의 작품에 두루 편재하는 원에 대해 ‘원은 점선이 공간적 존재로 전환되는 장소이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흔적이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축적되어 공간을 형성한다’고 밝힌다. 그의 원은 자족적이지 않고 열려 있는데 이는 완결이 아닌 접속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열린 원은 단순한 구멍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 앞과 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접속면(interface)으로, 열린 원을 통해 표면과 이면, 앞과 뒤, 과거와 현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만난다... 이 원에서 점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작과 끝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구조 안에서 서로를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점선은 끝나는 선이 아니라 끝을 통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선’이라고 밝힌다. 둥근 형태들은 원자와 같은 극소 입자의 차원에 내재하는 빈 공간부터 별들이 흩어져 있는 광활한 우주 공간까지 상상의 연결고리로 이어진다.
작품 제목은 작업을 하면서 생각한 개념이 포함돼 있고, 대개 시리즈로 확장된다. 최근 작품에서 ‘실마리’, ‘장’, ‘결’ 등이 등장한다. 그 모두는 상호연결된다. ‘실마리’ 시리즈는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거나 가려지는 실마리를 제목에 넣어 강조한다. 작품 「실마리 1_노랑 관계망」은 어두운 바탕에 밝은 실이 특징이다. 노랑 원은 공간으로 빛을 발산한다. 원 내부에도 연결망이 있다. 원의 크기 차이에 의해 물리적으로는 얄팍한 공간에 깊이감이 생겨난다. 배경에 수평의 점선들은 마치 악보처럼 우주공간에서 울려 퍼질 법한 음악을 연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도 관계망의 원형은 자연과 우주다. 왁구 위에도 자리한 입체 원은 화면 안과 밖을 연결한다. 작품 「실마리 2_빨간 관계망」 여러 중심을 가지는 파동이 붉은색 실로 표현된 작품에서 중심은 구멍이 나 있고 그 위를 횡단하는 관계망이 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개구부는 ‘과거를 바라보는 창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통로’이다.
열린 층위, 73 x 52.7 cm, Mixed media, 2026 (20호)
결의 파동, 55.5 x 43.5 cm, Mixed media, 2025 (10호)
또 다른 표면(또는 바닥)이 보이는 구멍은 입체교차로가 더 많은 교통량을 소화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색의 이름이 들어간 작품은 동질이상(同質異像)의 여러 작품군들 사이에 색채 관계를 맺게 한다. 색은 단독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서 확실해진다. 작품 「실마리 3_파란 관계망」에서 마치 단추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입체 동그라미는 화면 위는 물론 가장자리까지 자리하는 접점이 된다. 작품 「파동의 장」에서 점선으로 표시되는 연결망은 마치 무선 인터넷망처럼 직접적인 연결이 없거나 많지 않아도 연결을 유지한다. 공간은 파동이 주파하는 장이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공간 또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파동이 횡단하는 장이다. 지구 반대편 사람과의 통화는 물론, 멀리 있는 별의 사진도 지구로 보낼 수 있는 시대, 우주론에서 입자와 파동은 이제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되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는 시대가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팬데믹 시대에 경험했듯이, 나쁜 것도 초연결(Hyper-connected)을 통해 전파된다. 작품 「중첩의 장」에서 양자론에 관심을 가지는 작가는 파동이 중첩되고 간섭을 일으키는 현상에 주목한다. 그는 ‘중첩과 얽힘, 관계성, 불확정성이라는 양자적 사유가 제기하는 세계 인식의 가능성을 조형 언어로 수용한다’고 말한다. 작품 「순환의 장」이 푸른빛을 띠는 것은 일상에서 순환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현상이 물의 흐름임을 말한다. 고체-액체-기체 모두 미시적·거시적 차원에서 경험된다. 푸른색 계열은 순환하는 물질을 상징한다. 배경에 흔적처럼 나타나는 푸른색은 앞에서 칠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칠한 것이 배어 나온 것이다. 그는 화폭의 안과 바깥에서 모두 작업함으로써 형태가 흔적으로, 흔적이 다시 형태가 되는 순환이 발생한다. 푸른색 형태는 타원인데, 이는 원보다 움직임을 강조한다. 작품 「순환의 접속」은 형태와 배경이 난색과 한색으로 나뉘는데, 순환은 상태의 차이에 의해 일어난다.
연결의 결 II, 72.7 x 53 cm, Mixed media, 2025 (20호)
노란색 원에는 작은 원들이 박혀 있는데, 마치 프랙털 도형과 같은 모습이며 접속의 지점들 또한 많다. 입구와 출구가 하나씩만 있는 일방통행식의 흐름이 아니라, 큐브를 돌리듯 여러 경우의 수가 만나게 하는 실험이다. 자연은 유사 이래 이러한 실험을 무수히 실행해 왔다. 현대 물리학의 역사에서는 자연의 주사위 놀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도 있었다. ‘한 시간 동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일상적 표현에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가 직관적으로 나타난다. 작품 「시간의 궤적」처럼 시간이 궤적을 남기면 그 자리는 공간이 된다. 시공간이 함께 생각되는 현대적 사유와 관련된 이 작품은 여러 크기의(또는 거리의) 입자들이 궤도를 도는 듯한 형태로 표현된다. 오려지고 접혀지고 다시 이어지는 변화무쌍한 공간과 시간은 재현주의를 특징짓는 고정된 시공간과는 차이가 있다. 과학철학자 미셸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질서정연한 고전적 과학과 카오스를 포함하는 현대적 과학을 대조한다.
‘고전과학에는 정점(定占)과 좌표계가 있어서 고체를 투사하고 투영하는 인식론과 그에 따른 재현 체계가 있었다...이 질서의 중심은 정지된 점이며 조용히 참조만 하면 되는 이성’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점으로 회부되는 그 시대에 ‘세계의 표상들을 사유하고 증명하고 조합하고 실험하고 조직하며, 세계를 조감하고 관찰하며, 항구성 및 합리적 안정성이 지배한다...하나의 점에 준거한 체계로부터 질서가 펼쳐지며, 어김없는 정확성을 위해 인과율의 단일성이 강요된다...이러한 체계의 시대에는 총체성이 계획적으로 조직된다.’ 하지만 고전적 과학과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는 현대는 ‘점밖에 수많은 점이 있다...체계를 이루는 물체들은 결코 단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모든 분자에 의해 이끌린다.’(미셸 세르) 재현적 체계의 중심인 고정된 점들을 해체 구성하여 수많은 점들의 상호작용으로 바꾸는 김경선의 작품은 단선적 인과론과 거리가 있다.
연결의 결 III, 75.7 x 53 cm, Mixed media, 2025 (20호)
김경선의 작품에는 점이나 선 같은 기하학적 요소가 등장하지만, 엄밀한 공리적 정의에 기반한 인과론이 아니다. 그에게도 ‘필연성이란 유일한 가능성’(메를로-퐁티)에 불과한 것이다. 왁구 모서리에 붙어 있는 원형은 화면 밖으로 이러한 시공간의 운동이 이어짐을 암시한다. 작품 「열린 층위」에서 내부에 소기관들을 내장한 세포처럼 모인 형태들은 생명이란 것이 바깥의 것을 흡수하고 내부의 것을 뱉어내면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결’은 천과 바느질이라는 재료와 작업 방식 때문에 촉각적인 작품의 특성을 반영한다. 화폭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계속 동그라미가 작아지면서 층이 드러나는 작품 「얽힘의 결」은 프랙털 도형이 시간의 축을 따라 무한히 동형 구조를 펼치는 방식이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적으로 구동되는 기하학적 패턴처럼 김경선의 작품 구성 요소들은 시공간의 축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듯이 보인다.
구멍처럼 보이는 도형은 멀리 보이는 작은 원이 크게 되면서 그 내부에 앞으로 커질 작은 원들이 자리하는 식이다. 그는 ‘얽힘(Entanglement)’에 대해 ‘서로 다른 존재가 관계를 통해 하나의 상태를 이루는 것에 대한 은유’라고 말한다. 작품 「연결의 결 1」은 다른 작품들보다 입자 형태들이 많지만, 그들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내부에 방향성을 표시하는 원은 마치 금고의 다이얼처럼 맞춰지는 순간 또 다른 연결망으로 나아갈 것이다. 작품 「연결의 결 2」의 주요 구성 원소는 곡선으로 직선으로 연결된다. 직선은 바느질 없이 곧장 형태에서 형태로 연결되기도 한다. 「연결의 결 3」에서 직선 연결망이 압도적이며 둥근 형태들도 가득하다. 「연결의 결 4」에서 모서리에 위치한 형태와 더불어 바깥과의 연결망이 활발함과 동시에 중심으로 집중되는 구심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작품 「결의 파동」에서는 둥근 형태와 궤도의 관계 속에 사선의 움직임이 강조된다. 자체의 궤도를 돌면서도 나아가는 모습이다.
연결의 결 IV, 72.7 x 53 cm, Mixed media, 2025 (20호)
그의 작품에서 움직임은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변화무쌍한 시공간 개념을 생성하는 작품은 물질이나 우주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거시적인 비전과 더불어 그에 상응하는 주체성을 말한다. 그의 작품에 주요 구성요소인 원은 자아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아니엘라 야페는 [시각 예술에 나타나는 상징성]에서 원(또는 구)을 자아개념의 상징으로 풀이한다. ‘원은 인간 대 자연의 교섭을 포함하여 모든 각도에서 보는 영의 총체를 상징한다’(야페). 아니엘라 야페에 의하면 플라톤이 일찍이 정신을 구형에 비유해서 설명한 이후 원형은 정신세계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그 또한 ‘오직 한 원이 화폭을 다 차지하면서 전 우주를 한 품에 품는 듯한 고유한 의미를 지녔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다’고 말한다. 김경선의 원이 열림과 연결을 지향한다는 점은 ‘궁극의 완전성의 표상’(야페)이 아닌 완성을 향해가는 무한한 도정(道程)이다. 하나의 원이나 중심,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지름길이 아니라 차이를 두면서 무한히 회귀하는 원이다.
출전; (재)울산문화관광재단 2026 예술창작활동 지원(시각)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