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감옥의 수인(囚人)

 

이선영(미술평론가)

 


오원배의 작품은 관객이 알아볼만한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현실 어딘가에서 선택한 대상들의 맥락은 지워진다. 여백같이 남겨둔 바탕의 바닥은 심연이다. 그의 심연은 어둡지 않지만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백공포증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그가 설정한 상황극의 무대에서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힘에 고통받는다.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할만큼 오래 지속된 불편한 상황이 작품 속 인물을 보이지 않는 포승줄로 옭아맨다. 인형 닮은 인간을 포함해 툭툭 화면에 던져놓은 다양한 대상들은 단어가 되어 말한다. 올해 열리는 박수근 미술상 수상 전 《존재의 소리를 보다》는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성을 내포하는 전시부제로 그가 설정한 공간에서 무언극같이 진행되는 인간 존재의 소리를 들어 볼 것을 권유한다. 이 전시의 필자인 오정은(미술평론가)과의 대담에 의하면, 작품 속 사물들은 ‘오래전부터 수집한 오브제들’이다. 이 은유적 사물들은 인간 대신에 말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듯, 인간보다 사물이나 환경과 더 친해진 현대에 조응하는 화법에 활용된다. 





무제,270x430cm, 천위에 안료,2022 


무제,천위에 혼합재료,270x700cm,2021



작가는 이 대담에서 ‘몸을 통해서 시대의 삶 또는 사회상을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밝힌다. ‘몸은 시대의 자화상’으로 ‘몸의 동작은 언어적 기능을 갖고’ 있다. 인간은 회화라는 무언극의 무대에서 몸짓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몸의 말은 선형적 논리를 가지지 않는다. 여백에 흩어진 단편들에는 도처에 비약이 있다. 그가 작은 화면부터 큰 화면에 이르기까지 넉넉하게 배정한 빈 공간은 의미의 퍼즐이 움직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다. 오원배가 종종 활용하는 여러 화면이 한데 모인 작품은 화면의 틀 자체를 의미로 이어질 형식으로 활용한다. 그것은 인간을 정형화하는 구조로 작동된다. 각자이면서도 결국은 비슷한 인간이 비슷한 시공간에 좌표화된다. 어두운 바탕에 밝은 선으로 표시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부림친다. 인간인지 아닌지도 불확실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이해되는 보편성이 가능한 것은 각 공간의 주인공이 인간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가령 여러 식물이나 사물을 중간중간에 배치한 것으로 분명해진다. 존재가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면, 인간은 자연도 아니고 사물도 아닌 무엇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정 어법은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야생적이고 거친 식물이나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파편은 인간과 공(共)진화하는 비인간적 존재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려준다. 인간은 자연이나 사물을 대상화하면서 그스스로도 대상화됐다. 그가 설정한 공간의 사람은 독방의 수인(囚人)같다. 배경은 비워져 있기에 감옥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사회 속에서 추상화된 공간에 고립된 채 사는 현대인의 상황을 압축한다. 물리적으로 갇혀있지 않아도 갇혀있는 투명한 감옥이 현대인의 무대이다. 열린 감옥 안의 수인은 보이지 않는 집행인에 의해 고문당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익명적이다. 무배경의 심연은 그가 언제 어디에서도 고통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리 없는 매체인 회화에서 무언극 배우같은 인간의 울부짖거나 외치는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각자를 가두는 추상적 공간 안에서 메아리친다. 자신의 소리를 듣는 하얀 독백의 공간이다. ‘파랑새야’라는 글자가 들어간 작품에서 빈 새장의 주인공일 파랑새는 자유를 찾았을까. 두터운 붉은 벽 아래의 바닥은 심연이다. 작품 속 인간은 서 있는 듯하지만 실은 떠 있다.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작동하는 추상적 좌표 위에 배치돼 있다. 어딘가 배치된 것 하나만으로도 가두기 효과가 발생한다. 작은 의자 위의 나팔수는 부재하는 파랑새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입지는 좁고, 연주자에게 치명적인 마스크에 표현 도구인 나팔은 떨어져 있다. 좁은 입지 안의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들은 어떤 조합을 해도 슬픈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속 빈 병상은 환자가 이 세상 아니면 저세상으로 퇴원했음을 말한다. 기계적 환경과 불구의 인간은 서로를 가리킨다. 오원배의 작품 배경은 어디인지 불확실하지만, 마치 공사판처럼 구축되거나 해체 중인 어수선한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간 안의 모든 대상들은 연극처럼 상황을 연출한다. 조립 이전 또는 이후의 관들을 배경으로 여러 자세를 한 복면 쓴 인간들은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관처럼 통과하기 위한 수단들로 격하된다. 바닥없는 중성적 공간에 작가가 작게 그려넣은 사람들은 전쟁 또는 전쟁같은 일상이 만들어내는 획일화된 집단들이다. 현대의 관료제와 이를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체계는 보다 큰 하나의 흐름으로 사람들을 배치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시스템은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주의나 계급화된 현실은 합리주의가 결코 중립적일 수 없음을 말한다. 누군가의 합리주의는 누군가의 비합리주의며, 자본주의 사회는 양자의 이해관계를 가일층 확대시킨다. 모든 것을 통과시키는 관은 결코 투명하지 않고 애초의 기대처럼 기능적인 것도 아니다. 계몽의 역설은 근대 초기부터 예견됐지만, 인간을 도구화는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의 작동이 더 전면화되는 현대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에서 근대에 등장한 데카르트적 방식이 오랜 기간 일관성 있고 질서 정연하고 안정적인 자아라는 축을 중심으로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형성했지만. 미리 만들어진 움직이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자아를 꽁꽁 동여매는 일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말한다. 현대의 예술작품은 데카르트적인 방식에 따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현대 예술가들은 ‘잠자지 않은 상태에서 꾸는 꿈, 혼미하고 몽환적이며 희미하고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생각의 파편들, 형태를 찾기 어려운 의식 상태같은 내면의 대화에 귀를 귀울인다’(도미니크 바뱅). 지금은 보기 힘든 공중 목욕탕의 모습에서 통 안에 든 검은 액체는 무엇일까. 갱도 안에서 하루의 노동을 마친 광부들이 씻으면 저런 구정물이 나오지 않겠나. 좁고 어두우며 한 방향으로만 강제되는 갱도같은 삶에 대한 비유로 ‘막장’이라는 용어가 있다.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의 상태는 굳이 탄광촌이 아니어도 그와 버금갈 것이다. 


땟국물 빠진 그 물통에서 붓을 빤 물통이 연상되는 것은 예술 작업이 막장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예술은 대체로 고매한 정신노동에 속하지만, 오래 하다 보면 그 또한 상당 부분 육체노동임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오원배의 주된 기법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으로 존재의 몸짓을 표현한 기법은 파리 유학 시절 배운 프레스코이다. ‘프레스코를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석회의 화학작용을 이용한 표현이 고,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엄격한 노동’(오정은과의 인터뷰)이다. 오원배의 작업실에는 수많은 도구들이 있다.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 반듯하고 튼튼하게 제작된 사다리, 책걸상은 물론 전면 유리창까지. 하루의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면서 그 환경이 영향을 안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술가는 자유롭다고 생각되지만, 예술가 또한 수인이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수선한 공간에서 인간 대신에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은 비좁은 화분 속 초록 식물과 침울해 보이는 석고상이다. 





그림의 탄생 전, 예술의 전당, 540 x 470 cm, 천 위에 혼합재료, 2022년


작업실 전경



식물은 빛을 향해 맹렬하게 가지들을 뻗고 있지만, 그자체가 절단된 형태인 인간상에서 모든 색은 빠져있다. 짝을 잃은 레고 조각같은 구조의 단편들은 단단하면서도 헐겁다. 옥죄던 구조가 해체되어도 이미 자연과 인간에게 남은 힘이 없다. 인간, 사물, 동물, 구조물 같이 그의 작품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의 집합된 작품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이 모두 온전치 못한 단편들이라는 사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로부터 출발하는 반동, 즉 이어짐을 상상하게 한다. 그것들 모두 이어지기 위해 잘린 것은 아닐까. 인형과 동렬에 놓인 인간은 자신을 축소시킴으로서 환경을 거대하게 만든다. 이동하기에 턱이 너무 높은 바닥과 사다리는 카프카적 변신을 통해서도 탈주가 만만치 않음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에는 수많은 단면들로 이루어지는 구축 중의 구조가 있다. 뭔가 측량하는 삼각대와 그 옆의 안전모 및 용접 마스크는 그자체가 인간같은 모양새다, 


어수선한 공사장 일부같은 장소는 도처에 차단시설이 갖춰있다. 바닥없는 심연에 탱크들을 작게 그려넣은 작품은 차단시설이 전쟁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쟁이 없을 때도 수많은 보이는/보이지 않는 차단막은 현대인의 삶을 강제. 또는 조율한다. 비좁은 사다리 위에 새처럼 웅크리고 있는 남자는 비좁은 입지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대변한다. 홀로 감당해야 할 고통을 가려줄 여러 마스크도 필수다. 그 앞의 식물들은 사막같은 최악의 생태계 속에서도 자라나지 않는가. 방파제 구조물과 돌을 나란히 그린 작품은 자연과 인공을 비교한다. 방파제는 파도에 닳아서 곧 그 옆의 돌처럼 될 것이다. 인간사 또한 길게 보면 자연사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위로일까 허무일까. 그의 작품에 던져진 여러 대상들은 빈 배경 만큼이나 자유로운 조합을 권유한다. 그러한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작품 속 바둑돌은 대체로 음울하지만, 그래도 단편적인 세상에 의미의 맥락을 짜는 것은 인간과 예술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입지는 날이갈수록 좁아지지만 변화의 여지는 있다.

  

출전 ; 미술과 비평 202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