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다시 보는 종이와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구텐베르크의 세계와 추상미술

특정 매체를 명시한 [On Paper] 전은 종이를 그림과 같은 매체의 역사로 볼 것을 요구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 미디어는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감각의 확장이라고 본다. 따라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특정한 사회의 지배적인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 균형에 영향을 주는 조건이 된다. 이것이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의 의미이다. 미디어에는 감각적 편향성이 있다’(맥루한). 그렇다면 종이라는 매체는 어떤 ‘편향성’(즉 특성)을 가지는 것일까. 이 전시의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종이의 물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동시에 종이와 즉각 연결될 수 있는 문자나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문화사적인 의미로 뻗어나간다. 이 전시의 작품이 거의 추상미술임을 염두에 두면, 종이 매체의 첫 역사적 주인공, 즉 근대적 주체와 관련도 있다. 근대의 산물인 예술은 근대적 주체와 밀접하다.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종이-인쇄-문자성(literacy)의 연결고리로 통일된 시점과 내부지향성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최병소, 라이프(小) 0230901 Untitled, magazine, ballpointpen, pencil, 10.5x18.3x1cm, 2023

(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데이트갤러리에 있음)



‘안정된, 지속적인 성격은 동요하지 않는 확고한 모습’은 특정 감각, 즉 시각적 자세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감각이 분열되고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은 엄밀하게 획일적이고 반복가능한 활자에 의해 서적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겨난 일’이며, ‘시각적인 것은 회화, 시, 논리, 역사에 있어서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을 만든다’(맥루한). 문자문화에 충실한 이는 ‘제한 없는 자유와 자발성을 지닌 주관적 세계의 주체적 존재’였다. 개인주의는 개인적 창의력과 자기표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공명한다. 맥루한의 논의 중 미술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추상과 종이의 관계다. 맥루한의 논의는 시각성의 고립과 고도의 형식논리의 관계를 말한다. ‘진짜로 우리가 추상미술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감각 능력들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분절된 시각 감각 능력 만에 기초한 것’(맥루한)이다. 맥루한의 논리에 의하면 시각성은 고도의 형식논리를 낳는다. 


‘현대의 형식 논리는 가능한 최고의 정밀성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목적은 오직 안정되고 시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상징으로 구축된 명료한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맥루한). 이러한 언어는 영미권 분석 철학이나 근현대 과학에서 그 효과를 거두었지만, 모더니즘이 회화의 순수성을 위해 가다듬은 이론 또한 다른 감각들로부터 시각성을 고립시킴으로서 가능했다. 그린버그는 추상미술을 하나의 법칙으로 형식화한 대표적인 미술 비평가이다. 이 모더니즘 비평가는 현실의 재현이 아닌 실재의 세계와 똑같은 리얼리티를 갖는 미술작품을 원했고 옹호하였다. ‘분명하게 밖으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명시성은 한순간에는 한가지만 발현되고 한순간에는 한 감각 그리고 한가지 정신 혹은 물리적 작용만이 발현됨을 의미’한다. ‘다른 감각으로부터 추상화된 시각적 공간’의 세계와 ‘시각화 기술에 이미 세상이 동질화됐다’는 맥루한의 가설은 정보기술의 발달에 의한 시각적 코드화의 시대에도 적용되는 듯 하다. 


하지만 지금은 종이책으로 가능했던 차분한 논리적 주체의 시대는 아니다. 빠르게 명멸하는 코드를 소비하는 개별적 인간이 대세다. 21세기의 인간은 정보 알고리즘의 책략에 따라 편집과 분열을 반복하는 정보 소비자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On Paper] 전은 인간 소통의 역사에서 중요한 매체였던 종이의 매체적 특수성을 주목한다. 온라인 시대에 ‘종이없는’ 문화도 고무되지만 실제로 종이의 소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환경적으로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그만큼 종이가 (아직도)필연적임을 말한다. 데이트갤러리는 10여년 전에도 6인의 작가를 초대하여 동명의 기획전(2017년)을 연 바 있고, 참여 작가 몇몇은 겹친다. 김창열, 권영우, 정창섭, 최병소가 이전에도 참여했고, 박석원과 최명영이 새로 합류했다. 그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 작가도 있다. 박석원은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종이에 그린 추상 작품이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화가들과 나란히 서도록 했다. 


인류 소통의 역사에서 종이의 발명은 획기적이다. 동양에서 먼저 발명됐지만, 문화적 차이에 의해 발명이 산업적 생산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동/서양 양대 문명에서 문화가 기술을 보는 관점의 차이는 기계류를 포함해서 꽤 많다. 하지만 근대가 가능하게 했던 세계화를 통해 이제는 동일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경쟁 중이다. 코드의 공유는 물질문명에 비약적인 발전을 낳지만, 문화의 다양성은 점차 사라진다. 물론 현지 문화가 코드를 통해 더 잘 알려지는 점은 있지만, 삶의 뿌리로서의 문화적 개성은 약화되어 최악의 경우 관광상품으로만 남는다. 이번 전시처럼 이전의 매체를 현대에 다시 불러 세우는 것은 그 매체의 역사에 스며있는 의미와 감성을 활용하는 것이다. 종이를 통해 중세 말의 인쇄혁명도 가능했는데 이는 요즘의 정보혁명에 못지 않은 혁신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 의하면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준 인쇄는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리넨지가 도입됨으로서 가능했다. 


미디어 역사가들은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하는 근대를 연 것도 종이와 그에 부수되는 인쇄문화임을 밝힌다. 종이 이전에는 점토나 나무껍질, 짐승의 가죽 등에 기호를 적고 이미지를 새겼을 것이다. 여러 겹 겹쳐 쓴 양피지는 근대 이전의 소통방식을 호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비유가 되기도 했다. 가볍고 질기고 보존성까지 좋은 종이는 구술에 바탕한 전통의 많은 것을 무너뜨리고 시작된 근대의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다. 온라인 문화가 보편화된 지금도 중요 문건은 종이로 인쇄한다. 그 문자문화의 정점인 책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단순한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정서적 소통에 종이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종이 고유의 물성은 물론 종이로 가능했던 문화(인쇄)와 관련된 감성에도 주목한다. 무엇인가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종이는 정보 전달의 투명한 도구가 아닌 그자체의 존재 의미를 가진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매체는 최종적으로는 자기지시성을 향하며, 이는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방향이기도 했다. 모더니스트는 ‘평면의 조건’(최명영)을 탐구했다. 


자기지시적인 매체는 불투명하다. 달이 아닌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유리창으로 친다면 깨져 있거나 색이나 무늬가 입혀진 격이다. 모더니즘은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투명하다. 이 부분은 추상이 메시지를 원하는 대중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부분이며, 그 대목은 현대미술과 대중의 불화와 불신을 낳았다. 메시지 부분에 온갖 미학적 철학적 이론이 채워졌다고 나아진 것은 없다. 하지만 매체의 불투명성은 말로 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는 잠재적 영역이다. 투명한 메시지 또한 따지고 보면 자기지시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바로 자기 이익일 것이다. 이익을 포장하는 장황한 논리들이다. 더구나 동양의 전통에서 문자와 이미지는 주로 종이에 그려졌다. 세계적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한국의 단색화가 추상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풍부하게 한 것 중 하나는 종이, 특히 이 전시의 작가들이 주로 활용한 한지라는 재료의 도입이다.  

 


여섯 작가에게 각별했던 종이




김창열_회귀_Indian ink and acrylic on rice paper mounted on canvas_59x38_1983


김창열(1929-2021)의 1980년대 작품 [회귀]에서 종이에 가득 쓰인 한문과 그 위로 흘러내리는 물방울 하나는 텍스트로 생산되기 위해 예술에 투입된 땀과 눈물을 떠올린다. 그의 물방울은 강한 응집력을 가지면서도 여러 맥락에 배치되며 이러한 텍스트성은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다. 캔버스가 지지대 역할을 한 종이 위의 작품은 농담의 차이를 두어 이전의 문자들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그 위에 또 기재된 문자들처럼 보이게 했고, 이는 끝없는 글쓰기를 떠올린다. 그것은 화가에게는 끝없는 그리기에 해당된다. 물방울의 배경이 되는 문자의 숲은 화면 전체를 균일하게 도포하며 농담의 차이에 의한 추상적 원근감이 내재한다. 물방울은 빛을 머금은 영롱한 그림자 부분이 더 강조돼 있다. 회화에서 글자는 평면이라는 조건을 말한다. 또한 동양에서는 시서화(詩書畵)가 함께 하는 전통도 있다. 그의 작품은 글자로 조성된 평면 위에 물방울이 있는 듯한 환영을 보여준다. 거울이든 창의 비유든 현실에 대한 환영이 가능한 조건은 평면이다.  


최병소 0231219 Untitled, 2023, Paper,  ballpointpen, pencil, 80x120x1cm


최병소(1943-2025)의 작품에서 종이는 중성적 평면이 아니라, 책자 명이 드러난 잡지같은 구체적 사물이다. 책이라는 재료는 그와 어울리는 볼펜이나 펜슬을 불러들인다. 대략 훑어보는게 아닌 정독을 할 때 우리는 필기구로 행간에 줄을 긋고 메모를 하곤 한다. 신문지나 잡지 위에 작업하는 그의 작품은 그리기와 지우기가 구별되지 않는다. 하도 많이 그리고 세게 그어 흐들흐들 들려 일어난 종이의 물성은 강함과 약함이 공존한다. 바스러질 듯한 상황이지만 마치 석탄같은 광물질적 무게감이 있다. 잡지나 신문, 그리고 볼펜은 비(非)미술적인 재료이며 그 안에 담겨있었을 메시지를 지우는 과정은 가히 문화파괴적 행동으로도 보여진다. ‘life’라는 잡지명이 드러난 작품은 문명의 총아인 책 역시도 모든 것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에 따름을 말한다. 최병소의 작품은 그가 한정한 게임의 판 안에서 강도있게 실행되는 시작과 끝도 없는 과정이다. 



최명영 Conditional Planes Oriental ink on Korea pape_86x48cm_1980


최명영(1941- )의 [Conditional Planes] 시리즈는 한지와 먹으로 모더니즘의 핵심인 ‘평면의 조건’을 실험한다. 미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라져야 했던 것은 이미지와 서사였다. 사진이나 영상, 소설 등 다른 매체들로 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순수한 시각성이 자리하는 평면은 추상으로 귀결된다. 분업이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듯이, 이러한 감각의 분리 또한 미술 특히 회화를 논리를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준게 사실이다. 평면의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 화폭에 염색하는 단계까지도 나아간 모더니즘의 방식에서 한지와 먹의 조합은 그 형식적 조건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전통과 그 전통이 바탕한 자연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가장자리를 제외한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칠흑같은 먹은 사물의 형태나 음영을 다 삼켜버리는 밤, 우주같은 블랙이다. 다 칠하지 않아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가장자리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둠을 더욱 짙게 한다. 그의 ‘평면의 조건’은 빛과 어둠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대조법을 활용한다. 



박석원 Accumulation-24514, 2024, Korean paper on canvas, 89x89cm


박석원(1941- )의 작품에서 얼룩처럼 흐리게 그어진 삐뚤삐뚤한 수평선과 반듯하게 그어진 선들이 한데 어우러져 또 다른 수평 또는 수직을 이루는 [Accumulation] 시리즈는 기하추상 조각을 했던 이전 작업이 회화적 언어로 번역된 듯 절묘하다. 돌같은 육중한 물질의 집적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는 종잇장 같이 얇은 ‘물질’로 스며들었다. 작은 무게와 부피에 에너지를 집적하여 물리적 기계를 구동하게 하는 이동형 배터리처럼 초집적의 시대에 걸맞는 형식이다. 그의 조형언어는 수직방향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배열된다. 모더니즘적 추상에서 회화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치밀한 논리적 탐구는 선형적이다. 모든 진보가 그렇듯이 말이다. 전체적으로는 균일한 밀도를 지니는 수직, 또는 수평선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그 직선들을 중간중간 끊어 놓았다. 조각보다 유연한 형식인 회화 작업에 몰두했을 때 굳이 선적 논리에 갇힐 필요는 없었다. 그리드 구성의 화면은 얇은 종이의 굴곡면들이 만드는 미세한 음영의 유희로 가득하다.



권영우_Untitled_Gouache on Korean paper_65x54cm1980


권영우(1926-2013)는 동양화로부터 출발하여 동양화의 주재료 중 하나인 한지를 조형적으로 실험했다. 종이는 동양화가들의 전통과 동시대성 사이에서 방황 또는 실험하면서도 그들의 모태 언어가 생겨나고 회귀하곤 하던 바탕이다. 그가 행한 한지를 찢거나 긁거나 구멍을 내는 등의 작업은 바탕의 물성을 강조한다. 권영우의 작품에서 형태는 바탕 위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탕에 가해진 물리적 행위의 과정이고 그 흔적이다. 화면에 칠해진 물감은 숨구멍처럼 뚫린 공간들로 빨려들어가는 듯 하다. 스밈이나 퍼짐 같은 동양화의 어법이 연상된다. [무제]로 붙여진 패널 위의 한지 작품들은 그리드 구성에 자리한 원이나 소리 울리는 팽팽한 수직의 파동들이 형태나 선 같은 조형 언어의 본질을 보여준다.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자유로운 조형적 언어는 의미가 아닌 존재를 말한다. 만약 의미가 있다면 존재 이후의 의미다. 이러한 의미는 오랜 전통을 가진 화폭을 미리 점령하고 있는 기성의 의미들과 단절하기 위한 현대미술가의 해법이다.  


정창섭_묵고 No.96-CO1_캔버스에 닥_64x39.5cm_1996_1


정창섭(1927-2011)의 [묵고]는 그림이라는 매체의 말없음에 추상미술의 핵심인 마음과 생각 등 많은 키워드를 내재한다. 추상미술은 재현적 대상에 괄호치면서 정신에 몰두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서구의 추상미술은 그들의 전통인 기독교 외에도 이단 취급을 받았던 여러 종파들의 신비적 경향도 호출했다. 그것은 근대미술이 사회의 주류에서 약화된 종교를 계승했다는 해석도 낳는다. 동양의 미학도 그에 못지 않게 관념성이 강하다. 정창섭의 작품은 캔버스나 면에 닥을 두드려 펼치고 형태화하는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종이를 만들 때와 유사한 방식으로 물기가 남아 있는 섬유질 재료를 가다듬는 것이다. 종이라는 기능을 가진 대상 이전의 사물은 두툼한 조각적 질감을 가지면서도 안료를 흡수하여 보다 일체화된 평면을 만든다. 거칠거칠한 부분을 남겨놓은 가장 자리 안쪽에 보다 정제된 형태의 사각형은 질료와 형태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의 작품에서 질료와 형태의 관계는 인과적이 아니라 호환적이다.

  

출전; 데이트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