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그러나 아직은 아닌

 

이선영(미술평론)

 


반려로봇의 시대도 열린 마당에 그보다 더 오랜 반려동물은 새삼스러울 수 있다. 한국도 10명 중 3명 정도가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통계가 있을 만큼 보편화됐다. 박지혜는 어린 시절부터 동물과 함께했고, 어른이 돼서 유기견센터 운영이라는 꿈도 꿀 만큼 그의 동물사랑은 크다. 처음 시작은 유기견을 소재로 했지만, 관객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먼저 느끼게 된다는 점이 반려동물로 바꾸게 된 계기다. 작품 속 동물인 토끼, 개, 고양이 등이 귀엽게 다가오는 것도 작가로서는 피하고 싶은 대목이다. 대중적이고 보편적 주제이다 보니 선입견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가득 채우는 생각은 작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박지혜의 작품에서 인물과 동물 간에 흐르는 감정의 기류는 순수한 사랑 그자체로 다가온다. 아이가 등장하는 이유는 그 순수함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린넨에 먹, 과슈, 오일파스텔 같은 매체에 더해진 자수는 단순한 형식이나 장식이기보다는 아이의 순수를 그림에 꼭 잡아매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우리들의 시간, 80x160cm, 린넨에 과슈, 실, 오일파스텔, 2026



우리들의 시간, 80x80cm, 린넨에 먹, 과슈, 실, 오일파스텔, 2026



식물이나 동물 무늬의 자수는 함께 했던 행복한 시공간을 그 상태로 묶어둔다. 가령 소녀의 옷무늬의 자수와 안겨있는 고양이가 겹쳐 보이는 작품이 그 예다. 또한 옷 자수는 소녀를 영원히 소녀로 ‘묶어둘’ 것이다. 작업 재료에 대해 ‘천이라는 재료 자체의 따뜻한 느낌’ 때문에 선택했으며, ‘평면작업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전달하기 위해 직접 수를 놓아 작업하고 있다’고 밝힌다. 소녀는 동물과 함께한 시간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빛은 함께 하는 시간을 상징한다. ‘우리’는 동등하지만 차이는 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과의 근본적 차이인데, 그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지속의 시간에 대한 인지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에서 ‘인간만이 포착가능한 지속의 시간 속에 위치시킨다’고 말한다. 물론 동물은 인간과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지만 그 시간의 끝, 가령 죽음에 대한 인식은 없다. 그밖에 ‘에로티시즘, 금기, 노동’(바타이유) 등도 동물과의 차이로 언급된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동물 사랑도 그 순도가 높은 만큼 상처도 크다. 거의 모노톤에 가깝게 색을 억제한 작품은 함께하고 있는 행복한 그들이 지금도 그럴까하는 의문을 준다. 지금이 총천연색이라면, 지나간 시간은 흑백처럼 나오기 마련이다. 색의 억제는 현실의 지각보다는 상상이나 기억같은 시간적 범주를 강조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 제목에는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가 있다. 작품 [우리들의 시간]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모두 나와서 풀숲 아래의 빛을 응시한다. 소녀가 중심은 아니지만 그가 아니고선 서로 다른 종들끼리 한자리에 모일 수 없다. 소녀가 가지고 있거나 작품 중심에 놓이는 빛의 구슬은 소원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마법의 구슬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또한 켜진 것이며 빛의 강도도 달라질 수 있다. 태양이 아니고선, 아니 태양마저도 시간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빛은 강하지 않지만 무채색 톤의 어둑한 배경 때문에 더 환하고 온기가 있다. 작가가 좋아하는 요소들을 그린 후 빛을 추가하는 식으로 연출한다. 




 너와 나의 시간, 53x45.5cm, 린넨에 먹, 과슈, 실, 오일파스텔, 2026



너와 나의 시간, 72.7x60.6xm, 린넨에 먹, 과슈, 실, 오일파스텔, 2026



둥근 화면의 경우 빛의 구는 소우주를 반짝거리게 한다. 우리가 함께 한 때와 장소는 주로 자연이다. 수풀이 있는 아늑한 장소부터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 이르며, 빛의 원천은 자연보다는 구슬이다. 주로 소녀(나)가 들고 있지만 동물(너)도 들고 있다, 작가가 직접 키우기도 했던 하얀 토끼는 색 때문에 그 자체가 발광체처럼 빛나기도 한다. 갈대숲에서 포옹하는 강아지와 소녀가 있는 [너와 나의 시간]에서 빛을 안고 있는 것은 강아지다. 나와 너는 마주 보거나 한 방향을 바라본다. 나와 너는 동등하지만 때로 동물이 더 크게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는 레지던시를 둘러싼 반석산에서 본 고라니도 추가됐다. 사람이 빠지고 동물만 여럿 등장하는 작품도 있다. 대개의 반려동물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으며, 때 이른 이별이 예고 된다. 언젠가는, 그러나 아직은 아니어야 하는 한시적인 관계가 그들과의 관계를 연민에 가득 차게 만든다. 작가는 모든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얼굴 표정을 감춘다. 소녀의 둥근 볼에는 눈물방울 같은 하이라이트가 찍혀있다. 


동물과의 관계에 깔린 감정의 기조는 개인의 사연을 넘어선다. 어떤 부류는 동물에게 온 사랑을 쏟아붓지만, 전체 종으로서의 인간이 동물을 포함한 자연에게 한 행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가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지적하듯이, ’언제나 더욱 제한된 소수의 이익이 되도록 요구하는데 사용된 휴머니즘’(레비 스트로스)은 인간중심의 목적론의 결과다. 인간이라는 한 종이 지구를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세워진 문명 속에 동물의 입지는 좁디좁다. 있는 그대로도 평안치 않고 보호를 받아도 마찬가지다. 그런 비대칭 구조는 타자화된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된다. 동물은 장차 더욱 많아질 타자들이 겪는 일을 선제적으로 통과하기에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박지혜는 자신의 작업이 ‘어떤 시리즈로 변화되더라도 늘 나보다 무언가를 위한 작업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함께 있을 때 더욱 빛나는 순간들, 그 시간을 품고 지켜내려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참고작품)너와 나의 시간, 45.5x53.0cm, 린넨에 먹, 과슈, 실, 2025



(참고작품)너와 나의 시간, 60.6x60.6cm, 린넨에 과슈, 실, 오일파스텔, 2025



(참고작품)너와 나의 시간, 지름40cm, 린넨에 과슈,먹, 2026




(참고작품) 너와 나의 시간, 지름30cm, 린넨에 과슈, 먹, 2026




출전; 동탄레지던시(화성시문화관광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