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

오민, 카밀 노먼트 2인전(5.22—7.19, 아르코 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


 

얼마 전 끝난 선거까지 가세해 온통 시끌벅적한 거리, 그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리는’ 거리를 도배한 플래카드와 글자수 많고 큰 간판들, 아이돌 그룹의 무술에 가까운 과격한 집단 무용이나 이를 모델로 여럿이 한 동작으로 힘차게 움직이는 광고물은 한국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듯하다. 예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같은 시적 표현에 약간의 의구심을 가졌는데 요즘의 ‘한국적 정체성’으로 보편화되다 못해 강제된 ‘역동성’이 그리 편치는 않다. 여러 집회가 상시적으로 열리는 대학로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소리들을 뚫고서 아르코미술관의 오민-카밀 노먼트 2인전에 도착해, 또 다른 의미의 분산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혼돈 속의 질서, 요컨대 혼란스럽지만 그 미적 의미가 공감되는 소리들이다. 미술관까지 가기 위해 통과했던 각종 소음을 상쇄하는 간섭파같은 소리가 괜히 바쁜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미술작품은 원래 눈으로만 보니까 오히려 소리는 이질적일 수 있다. 미술관은 과도하게 자극받는 감각적 피로감을 잠시나마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오민 [동시], 2026(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아르코미술관에 있음)



오민



물론 거기에서 듣기 편안한 무슨 음악같은 것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아니다. 공공공간을 채우곤 하는 백색소음은 음악을 무의미한 배경 장식으로 만든다. 그 안에서 편안한 것은 그것이 그저 습관이 됐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소리는 이미지보다 불확실하게 다가온다. 거기에다 이 전시에서 주목하는 노이즈와 다성성은 더 불확실하다. 오민와 카밀 노먼트의 2인전 《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은 영상, 소리, 말, 설치 등이 어우러지는 전시로, ‘다원예술 창작주체 지원사업 선정 작가인 오민의 작업 세계와 공명하는 해외 작가 카밀 노먼트를 초청해 기획’(아르코미술관)된 만큼, 양자는 대화적 관계에 놓여 있다. 예술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여러 편의 작품을 ‘동시’에 상영하는 오민, 그리고 전시장에 두툼한 목재 구조물을 배치하여 인공 숲처럼 꾸미고 음향을 설치한 카밀 노먼트의 전시는 다른 것만큼 공통점이 있다. 《어긋난 파동, 흔들리는 시간》이라는 전시부제는 작품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특징을 말해준다. 


오민의 [동시] 연작은 공간 곳곳에 설치된 여러개의 화면에서 동시적으로 흘러나오는 말(인터뷰, 강의, 퍼포먼스 등)이 무질서하게 다가올 수 있다. 말에 관한 한 단선적인 것이 정확한 듯 들려오기 때문이다. 카밀 노먼트의 [플렉서스(리좀) 서울]은 리좀처럼 배치된 통나무 설치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운드(서울에서 협업한 작가들의 목소리와 아르코미술관의 주파수를 반영한 작곡 등)를 명확한 소리나 말이 아닌 진동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이 있다. 그들 작품의 무질서와 불확실성은 기계와 대조되는 생명의 핵심이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인간과 죽음]에서 ‘기계의 단순한 해결이란 그 기계 구성요소의 높은 신뢰도에 의해서 엔트로피의 진행을 지체시키는 것인 반면, 살아있는 것의 복잡한 해결이란 무질서에서 살아있는 것의 질서의 갱신을 끌어내기 위해, 그 무질서를 강조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생은 적대적이며 또 동시에 협력적이고 보충적인 관계에서 무질서를 용인함과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고 또 그것과 싸우면서 그것과 함께 작용한다.’(에드가 모랭) 




카밀 노먼트_〈플렉서스(리좀) 서울〉_2026



카밀 노먼트



‘영원한 재조직과 자기생산’(에드가 모랭)인 생명의 모델에서, 기계적 확실성은 의문에 붙여진다. 오민의 작품이 염두에 두듯이 화면의 완결성을 위해 제거된 NG 화면이란 결국은 코드이며 잘 가다듬어진 코드는 예술적으로는 비어있다. 가령 우리는 평소에도 매끈한 수사학에서 건질 내용이 없는 경험을 종종 한다. 카밀 노먼트의 작품 또한 음울한 독백이 아니라 ‘축제와도 같은 다성성’(바흐친)에 호소한다. 전시장에는 통나무를 길게 잘라 만든 설치 작품도 앉아서 쉬다 갈 수 있다. 관객이 미술관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은 소통의 질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현대인은 다양한 미디어 기기에 수시로 접속하지만, 이제 영화관도 잘 안 가는 변화 속에서 공간을 활용한 입체적 사운드는 미술관에서 할 수 있는 효과적 연출 중 하나다. 여러군데서 소리가 나오는 카밀 노먼트의 작품은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듣게 한다. 관객이 앉아 쉴 수도 있는 많은 자리들이 일종의 울림통이 되어 소리의 진동을 전달한다.   


노르웨이 오슬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카밀 노먼트는 현대미술과 음악을 넘나들며 작업해 왔다. 그는 ‘소리를 신체와 공간, 시간과 역사가 만나고 충돌하는 장으로 다루어왔으며, 사회·문화적 현상을 사운드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자신의 미학적·개념적 틀을 문화적 정신음향학(cultural psychoacoustics)으로 정의’한다. 전시장 2층에 리좀식으로 연결한 목재 구조물에 내장된 진동 스피커는 귀가 아닌 온몸에 작동되면서 소리의 중심을 해체한다. ‘비언어적인 다성적 허밍과 발성으로 이루어진 합창’에서 주도적인 소리는 없다. 관객이 이동하며 머무르는 곳에서만 감지되는 소리들이 있을 따름이다. 작품 개념어 중 하나인 ‘리좀’의 위계 없음은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작가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작가의 의도와 관련해 역사와 사회 기저에 깔린 민초(民草)들의 소리를 상상할 수 있다. 




오민



오민



오민의 전시장은 많은 스크린이 배치되어 있고 동시에 영상이 나오기 때문에 더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화면 하나에 주시하면 오랜 작업에서 나오는 경험적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외에서 음악과 디자인을 전공한 오민이 예술의 형식과 구조에 관해 수년간 연구해온 내용은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통해 아홉 개 스크린 채널로 상영된다. 각각의 영상은 따로 제작되었으나 이번 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한다. ‘동시’라는 개념은 충돌과 불안정성을 내포하며 ‘노이즈’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에 대해 ‘모든 실수와 오류가 제거된 OK 숏은 실상 텅 빈 상태에 가까울 수 있으며, 노이즈란 곧 디테일의 다른 말일 수 있다’고 하면서. 이 노이즈가 ‘촬영 현장만의 경험이 아니라 답을 모른 채 수많은 결정을 내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각 스크린에는 서로 다른 인물이, 또는 같은 인물의 다른 각도의 인터뷰가 나오며 영상이나 퍼포먼스, 음악 등에 관련된 작가들의 미학적 의견이 흥미롭다. 


동시적이지만 모두 이어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들의 말은 한 줄로 죽 가야 하는 선형적 논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구술이기 때문이다.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그 중 누군가 말하는 작품은 요즘 대세가 된 거대 PPT 화면이 아니라 앉아 읽으며 청중과 수시로 눈을 맞추며 내용을 전달한다. 인터뷰 내용은 음악같은 시간예술에 대한 이야기였고, 단문의 자막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보기보다는 집중해서 듣는다. 말하는 이는 메모지를 들고 있긴 했지만 예술 작업의 체험에 근거한 내용을 구술한다. 하나의 행위를 여러 각도로 촬영하여 여러 화면에 보여주는 것은 문자적 선형성이 아닌 구술적 다(多)중심성과 관련된다. 시각은 한 시점에 고정되기 마련이지만, 소리는 여러 곳에서 들려온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음향적, 혹은 청각적인 다 방향적 공간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시대의 특징은 ‘동시성(simultaneity)’으로 규정한다. 




카밀 노먼트



카밀 노먼트



‘동시적 관계의 장에서 작동하는 청각성은 깊이와 신성이 관련된 어떤 세계’(맥루한)를 불러들인다. 시각중심주의는 근대에 강화되었다. 하지만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의 역사에서 밝혔듯이 지구촌 시대에 구술성은 복귀한다. 물론 이는 월터 옹의 [구술성(orality)과 문자성(literacy)]에 정리되어 있듯이 인쇄에 의해 열린 근대가 약화시킨 원시적 구술성은 아니다. 근대적 문자성까지 포함한 구술성이다. 미술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큰 자극이 되었던 사진이나 영화도 일찍이 미술이 고민했던 정체성의 위기가 닥쳤다. 어느 시대보다 많은 영상이 만들어지고 소비되지만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대형 영화관도 위기를 맞고 있는 형편이다. 모든 오프라인 공간이 간편한 온라인 문화소비로 침체되어 있다. 미술관이 예술적 질적 기준을 충족시키면서 오감을 총체적으로 자극해 줄 환경적 차원을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전시는 감각 간의 관계를 활성화하면서 둔감해진 어떤 감각을 일깨우는 체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