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 역행이라는 소통전략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은희의 [웅장하고 싶다] 전은 예술의 몸통이기도 한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 인류의 문화사 자체가 소통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매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소통은 현대문화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인간끼리의 소통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등 소통의 맥락은 무한대로 확장하고 있다. 특히 기계가 담당하는 소통의 몫이 커진 상황이 서은희의 작품에도 반영된다. 이번 전시에서 몇몇 작업이 이모티콘 형식을 닮았다는 점, 그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를 설정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물적, 심적, 신체적으로 무한 투입이 필요한 예술적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더 효과적인 소통방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서은희 또한 예술적 작업만이 그를 잘 표현해준다고 믿는다. 전시부제 ‘웅장하고 싶다’는 일종의 희망 사항으로, 지난 수십년 간의 작업에도 주변부에 머물러있다는 생각이 낳은 반대급부다.

그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비주류라고 규정했다. 주변을 맴돌며 중심에 서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태도는 작업에도 스며들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는 현재 웅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큰 전시를 앞두고 작업하는 공간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런 생각을 부추켰을 수 있다. 작업을 우선순위에 놓고 싶어도 온갖 시시콜콜한 일들이 발목을 잡는 현실을 초월하기 힘든 것이다. 한편으로 잡다한 문제들을 모두 소거해 버리면 삶에서 남는 것은 거의 없고, 심지어 예술 자체도 사라진다. 출산과 육아를 포함한 재생산 노동이 있어야 예술을 포함한 생산도 가능하다고 할 때, 사소함은 삶과 예술에서 뗄 수 없는 관계다. 삶과 예술의 밀접함 속에 예술의 지속성(또는 다시 시작)이 가능하다. 그가 자신의 작업 및 삶의 조건을 보편적 맥락으로 내세운 이유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웅장할 수 있는 기회가 최소한 몇 번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전시회다. ‘웅장’이라는 희망사항은 깔끔하게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 개막 이후에는 가능하다. 전시회는 일정기간 동안 총력을 다했던 산물을 가지고 작가를 객관화시키는 계기이며, 그다음 전시의 과제 또한 던져준다. 그러니까 ‘웅장’의 문제는 작품 스타일이나 그만의 조건이 아니라, 전시회 전의 모든 상태에 해당된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가장 먼저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쪼개서 작업해야 하는 현실은 ‘웅장한’ 규모의 작품을 할 수 없게 한다. 가령 작품 규모는 최소한 작업하는 공간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크기에 한정될 것이다. 서은희의 해결책 중 하나는 연결하기이다. 이번 전시에서 판화지 여럿을 붙여서 한 작품으로 만든 게 있는가 하면, 고무지우개나 작은 나무토막에 새긴 이미지들의 집합이 또 하나의 작품군을 이룬다. 하지만 예술이 전적으로 날 것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이나 물자체가 아닌,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관례에 따른다. 언어가 변화하는 계기인 위반 또한 관례와의 관계에서 가능하다.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이는 현대미술만큼 강력한 예가 있을까. 삶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자율적인 관례가 소통불능을 야기했다. 일상과 예술의 관계, 미미함과 웅장함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정보사회에서는 코드/탈코드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과학기술-관료주의의 연합으로 가일층 대중적인 코드화가 대세인 가운데, 이를 탈피하는 것은 예술의(또는 예술적인) 몫이다. 삶에 있어서 가용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적 몰입은 소통으로부터 그를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예술가는 괴팍하다. 분업화되다 못해 파편화된 현대적 일의 세계에서 자기 주도형의 작업이란 걸림돌이 많기 때문이다. 예술에 몰입하는 삶은 행복한 만큼이나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소통은 늘 중요했고 예술은 소통이었지만, 정작 소통 중심의 사회가 도래했을 때 그 중심에 있는지는 미지수다.
예술과 문화는 차이가 있다. 문화가 질적으로 고양되면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이 대중화되면 문화가 될 수 있다. 그 둘의 양상은 차이가 있을 뿐 우열은 있을 수 없다. 흐릿한 인쇄본 명화를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울 수도 있고, 이름없는 사물에서 영감을 얻어 명작이 나올 수도 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동중심의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시점에서 자기주도형의 작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예술의 저변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서은희 또한 이러한 대중적 소통의 시도로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성격이나 상황이 너무 깊이 반영된 나머지 대중들이 활용하기에 너무 어둡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았다. 멧돼지에 자신을 투사하는 것자체가 그러하다. 그는 이에 대해 ‘어릴 적 나는 못났다(못생김, 굳은 표정에 대한 무섭다 라는 말 등등) 는 말을 주위에서 자주 들었다. 그 말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며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심통이 났어]는 다소간 어두운 기분이나 정서가 담겨있다. 그는 ‘어두워서 부정적인 게 많아 이모티콘으로 쓸게 없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는 자신을 대신에서 등장하는 멧돼지 캐릭터가 여러 상황에서 서사를 주도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멧돼지는 대청댐 근처 시골 출신인 작가의 이력이 반영된 캐릭터다. 그는 어릴 때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체험이 있다. 하지만 현재 도시의 대단지 아파트에 살면서 문명이 주는 편리함 속에 살고 있는 작가에게 멧돼지는 여전히 멀리 있는 존재다. 물론 희망 사항이 투사되는 예술작품에서는 얼마든지 등장 가능하다. 인간중심주의가 수많은 동물을 지배하고 주변화시키면서 멧돼지 또한 주어진 영역을 벗어나면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긴 했어도 특유의 저돌성이라든가 귀여운 면모는 특성화시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판화지 4장을 붙여 만든 작품은 여러 숫자가 적힌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작품이 출력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작업 공정이 복잡한 판화는 그리기만큼이나 만들기에 가깝다. 서은희는 이러한 힘듬 자체가 오히려 판화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판화는 여러 장 찍어도 똑같지 않은 점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유학 후 초기에 주로 작업했던 동판화는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당시 동판 위에 드라이포인트로 직접 작업했으나 지금은 목판화나 실크스크린 등으로 방점을 바꾸었으며, 일상적 공간에서 할 수 있는 고무에 새기는 작업은 2008-9년부터 꾸준히 지속해왔다. 그의 작품 맥락에서 판에서 현실로 나온 것 같은 효과다. 버튼만 누르면 큰 두루마리 종이에서 이미지가 출력돼서 상자에 담긴 완제품으로 생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인쇄물이 제작될 때 이런 모습일 듯싶다. 판화 또한 인쇄처럼 찍히는 것이지만 후자는 대량 생산이라는 차이가 있다. 관객 내지 소비자에게 내 작품이 도달하고 다음 생산의 동력을 얻을 수 있는 단계까지가 이 작품에 담긴 희망 사항이다.


종목과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자동화 시스템은 놀라움을 준다. 운이 좋으면 탈코드화의 단계는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술작품은 코드인가? 서은희의 이모티콘과 캐릭터 작업은 예술과 코드의 경계에 존재한다. 작업에도 창의적인 부분과 반복적인 부분이 있다. 반복 또한 작가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는 몸통을 생략한 채 솜씨가 발휘되는 영역인 손만 표현했다. 손 또한 기계와 보조를 맞추는 과정에서 정확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드 형태 무늬의 옷을 입었다. 손은 스위치를 누르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생산물들을 관리한다. 인간의 손은 ‘생활의 달인’이 아니면 기계적 정확성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술은 그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시킨다. 예술은 손과 더불어 가능하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손은 창조의 도구이지만 무엇보다도 지적 기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앎과 창조의 기관들이 점점 더 우리의 신체를 떠나고 있다.’(레지스 드브레)
[철학자들의 동물원] 또한 인간에 있어서 손의 위상을 강조한다. 저자는 ‘말을 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존재만이 손을 가질 수 있고 손으로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동의 인간적 가치를 강조한다. ‘노동이 인간적인 가치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으로 존재한다’(쇼파르). 예술은 언어이며 노동이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 의하면 그림은 느리고 정보과학은 빠르다. ‘예술은 유럽에서 탄생되었다. 최소의 공간에서 최대의 다양성으로. 그리고 영상적 시각은 최대의 공간에서 최소의 다양성으로 미국에서 탄생했다. 공급이 수용에 따라 조절될 때 정보가 존재하고 이미지의 공급이 수요와 관계없이 생산될 수 있을 때 예술이 존재한다’(레지스 드브레) 기계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미지를 표현한 서은희의 작품은 기계복제 시대에 변할 수 밖에 없는 예술의 위상을 알려준다. 그의 작품 속 멧돼지는 그 실루엣이 뾰족뾰족 날카롭다. 이빨도 다 드러내고 귀를 비롯한 등판의 털들이 서 있다.


자아가 투사되는 멧돼지의 모습은 둔감함과 예민함이 무서움과 귀여움이 공존한다. 공포와 환희의 표현형은 크게 다르지 않은 만큼 멧돼지가 화가 난 상태로 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동물 캐릭터에 내장된 야생성은 문명이 잊거나 억압된 무엇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기회가 된다. 그의 멧돼지의 인간적 측면은 시선의 교환에서 온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주체 사이의 간극 속에서 인간적 비극이 생겨난다.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멧돼지는 귀엽지만 누군가를 째려보는 눈을 가졌다. 타자를 향해 가끔 튀어나오는 솔직하지 못한 감정, 숨기고 싶은 태도의 흔적이다. 멧돼지는 타자를 향한 시선이자 동시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긋난 마음이나 슬픔, 기쁨, 즐거움, 다양한 감정의 흔적을 기록하는 행위와 소통이 언제나 어긋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내 어긋남을 숨기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귀여운 기호로 치환함으로써 주체는 타자와의 거리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방식을 실행한다.’고 말한다.
동물이 주인공인 만큼 그 주변의 다른 동식물 또한 성격을 부여받는다. 중세 기사의 갑옷같은 의상을 걸친 멧돼지가 등장하는 작품은 극도로 자기방어적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지만 현대미술이 그러한 표현을 고무하는지는 회의적이다. 여러 사회적 상황 속에 놓인 자신을 표현하는 서은희는 한 개체에 주목함으로서 작품의 맥락을 만들고 그 안에서 다양한 상황 연출로 이야기한다. 작품 속 멧돼지는 무한대의 사랑을 쏟아야 하는 자식과의 관계부터 혼자만이 시간을 즐기는 등 여러 상황에 놓인다. 다리 부분만 보이는 거대한 맷돼지 아래 새끼가 서 있는 작품에서 새끼와 어미의 관계는 꽃봉오리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홀씨만큼의 노력과 운이 따라줘야 하는 사랑이 깔려있다. 미디어 기기에 연결된 채 음악 삼매경인 멧돼지는 선적 수행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도 고요하게 내리깔고 있다. 그것은 씩씩대며 이러저리 돌진하는 평소의 모습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복잡한 선의 궤적과 멧돼지의 결합은 그것의 이동 경로를 생각하게 한다. 가령 GPS로 추적하면 동물의 경우 일정 영역의 활동반경이 드러난다. 우리의 일상 또한 마찬가지다. 새로움을 꿈꾸지만, 삶의 기조는 익숙함이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 겹의 선들은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최단의 지름길을 찾는 관점에서 본다면 낭비일 것이다. 색이 다른 여러 판이 모여 물과 식물, 그리고 동물로 대표되는 자연환경을 표현한다. 판화에서 가능한 여러 층이 공존하는 화면은 단순함 가운데 복합적인 자연의 모습을 담는다. 면과 면의 경계도 위반된다. 가령 멧돼지의 귀나 등판의 털 부분은 몸통과 달리 녹색 계열이다. 그의 멧돼지 형태 자체가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이다. 멧돼지가 붉은빛인 것은 다혈질, 날카로운 선적 표현은 단도직입적인 성격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것이 놓인 자연환경 또한 원근법과 상관없이 개념적으로 도해 된다.
3x3열로 배열된 화면은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색감으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조각칼의 궤적이 드러난 형태들은 날카로운 외곽선을 가진다. 정사각형 나무 조각에 새긴 여러 표정의 이모티콘이 담긴 작품은 찍은 것도 원래의 틀도 같이 전시한다. 그의 틀은 마치 옛날에 자음과 모음이 구별된 활자들처럼 조합을 통해 메시지를 산출할 수 있다. 인쇄-문자문화가 지나가면서 평범한 문장 하나를 만드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 됐다. 그래서 이모티콘의 필요는 커진다. 작은 사각형을 넘어가지 않는 여러 도상은 그 안에서 최대한 표현한다. [이모티콘]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힘든 작가가 은유적 대상을 통해 간접적인 소통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문자 대신에 그림문자로 소통하는 셈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모티콘은 감정을 단순화한 기호이면서 동시에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불완전한 언어다. 나는 소통의 실패와 감정의 흔들림을 이모티콘이라는 기호체계로 전환한다.’고 말한다.


여러 개가 같은 형식으로 나열돼 있어 작품 전체적으로는 잠재적인 움직임이 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선이 낱장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같은 형식에 담긴 동일한 비율의 형태들이 공간적으로 나열됨으로서 시간성, 즉 서사가 펼쳐진다. 대량 구매한 고무지우개를 활용한 작품도 마찬가지고 일련의 단위 구조를 확장해 나가는 작업은 자투리 시간과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형식이다. 그 시공간을 끊지 않고 계속 이어가는 것 그것이 그로서는 웅장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웅장해지기’에는 자신의 또는 일상의 노력을 넘어서는 어떤 단계가 요구된다. 양적인 축적이 질적인 고양을 낳고 그것이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설 수 있다. 아름다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현대를 낳았다. 미학은 이를 미와 숭고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숭고의 조건은 소소한 일상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차원을 요구한다.
동물 주인공은 공간적 규모보다는 시간적 역행의 전략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을 확보하고자 한다. ‘웅장해보고 싶다’는 그가 동물 캐릭터를 통해 근대 이전의 어떤 감성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시도를 말한다. 찰스 테일러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근대성(modernity)이란 새로운 실천과 제도적 형식(과학, 기술, 산업생산, 도시화), 새로운 생활양식(개인주의, 세속화, 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불안들(소외, 무의미, 절박한 사회적 해체감)이라고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성의 주된 특색은 탈주술화의 진전, 마법적 힘과 영혼 세계의 쇠락이다. 하지만 서은희의 작품이 아니어도 인간보다 동물 캐릭터가 소통에 유리한(이는 대중문화의 관례에서 확인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에 대한 현재의 맹목적인 숭배는 예술의 시대보다 아득히 먼 우상의 시대와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디어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서은희의 동물 캐릭터는 원시적인 상징 이미지의 힘을 다시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출전 ; 충북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