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이후에도 남는 것: 김희곤 《존재조건》, 구구갤러리


전시전경

구구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김희곤의 개인전 《존재조건》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 풍경을 응시한다. 그는 오랜 시간 인간의 정체성과 고통, 치유,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명제에 천착해왔다. 초기 작업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는 검은 선과 인체 형상은 작가의 실존적 고뇌를 투영하는 매개체다. 

전시가 진행 중인 구구갤러리 전경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지점은 파괴의 격렬함이 잦아들고, 형상과 비형상,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갤러리 안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1962년생인 김희곤은 가부장적인 가정환경과 오산공군기지 주변의 이질적이고 개방적인 문화 사이에서 틈새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청년기 겪은 신경쇠약은 역설적으로 그가 1986년 미술이라는 출구를 찾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게 창작은 고통을 견디는 도구이자,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통로였다.


〈Hello 비너스〉,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38×72㎝

초기 회화에서 검은 선은 대상을 묘사하는 윤곽이라기보다, 불안정한 내면이 밖으로 터져 나온 흔적에 가까웠다. 2003년을 기점으로 그의 작업은 평면의 캔버스를 탈피한다. 철사, 비닐, 의자, 탁자, 옷 등 실재하는 사물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평면의 선은 공간을 점유하는 입체적 철사가 되었고, 사물은 본래의 기능성을 상실한 채 낯선 존재로 치환되었다. 2006년 이후 ‘self’ 연작에서 그는 신체 형상에 송곳을 박거나 종이를 찢는 등, 고통받는 인간의 신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물리적 해체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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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전시는 ‘해체’를 대하는 작가의 인식적 전회를 보여준다. 부수고 떨쳐냄으로써 구속 이전의 자아로 회귀하고자 했던 과거의 갈망 대신, 이제 그는 인간 조건의 불가항력적임을 인정한다.


〈선을 따라서〉, 2022, 린넨·나무 패널·볼펜·레진, 42×29.5㎝

Q. 작가님에게 ‘해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갈등과 고통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굳은 인식, 고정된 관념, 흑백논리처럼 우리를 구속하는 프레임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정체성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지만, 관계 속에서는 갈등이 되고 자신에게는 고통의 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또 다른 이미지를 생성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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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작업에서는 물리적인 파괴가 줄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예전에는 찍고, 뚫고, 부수는 물리적인 해체가 강했습니다. 그런데 20년 넘게 작업하다 보니 존재는 떨쳐내려고 한다고 완전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상향을 잡으려고 한다고 잡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물리적 해체는 절제되지만 인식의 해체는 여전히 중심에 있습니다.”


〈재구성된 초상〉 연작, 2024-2026

Q. 이번 전시에서 말하는 ‘존재조건’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생존과 소멸, 욕망과 고요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생성과 사라짐의 경계에서 긴장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실존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존재의 흔적을 작품에 담고 싶었습니다.”


〈붉은 흔적〉 연작,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각 116.8×91㎝

작업 전반에 반복되는 붉은색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는 단순히 피와 상처라는 일차적 감정을 넘어, ‘살아 있음의 흔적’을 증명하는 생명의 표식이다. 소멸의 징후인 동시에 생명이 여전히 박동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기호인 셈이다.

〈재구성된 존재 2〉,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53×45.5㎝

최근의 ‘재구성된 존재’ 연작에서도 변화는 감지된다. 뒤엉키고 껴안는 인물 형상은 타인과의 포옹인 동시에, 분열된 자아를 긍정하고 통합하려는 연민의 제스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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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은 작품 속 찢긴 틈과 구멍을 단지 폭력적인 파괴의 결과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김희곤이 말하는 해체는 고통의 과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상처를 공유하기 위한 장치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너도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건네는 나지막한 위로의 공간이다.


김희곤 작가

《존재조건》에서의 해체는 존재 부정의 방식이 아닌, 삶을 긍정하기 위한 필수적인 통과의례다. 형상은 지워지지만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찢긴 표면은 새로운 이미지를 잉태한다. 고통의 틀을 파괴하는 데 몰두했던 과거를 지나, 이제 그는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을 인정하고 그 경계 위에서 피어나는 연민의 미학을 그려내고 있다. 파괴에서 연민으로, 자기 치유에서 공감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그의 여정은 7월 22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