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과 소리의 만남 

정유미 전(5.1.-6.20, 아뜰리에 아키)

 

이선영(미술평론)



우주에서 포착된 지구는 바다와 구름이 뒤덮인 푸른 별로 나타난다. 지상에서도 지구를 감싸는 공기가 빛을 산란하기에 하늘은 푸르게 보인다. 정유미의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하다. 그렇기에 그에 맞닿아 있는 상상은 더욱 보편적이다. 다양한 변모의 과정은 자연적 실재에 닿아있기에 설득력 있다. 정유미의 개인전 [유수음(流水音) Flowing Volume]은 ‘흐르는 물(流水)과 소리(音)가 만나 무한한 부피를 이룬다’는 의미를 담는다. 개념은 물과 소리에 맞춰져 있지만, 구름 또한 많이 등장하며 색감이나 형태 면에서 구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떤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구름은 유연한 소재이다. 구름은 물과 성분이 유사하고 천둥번개 같은 소리는 지상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압도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무한한 부피’를 가진다는 점에서 ‘유수음’과 밀접하다. 구름은 폭포라든가 바다같이 중력의 방향이 확실한 흐름과 달리, 둥 떠 있으며 온갖 모양새가 가능하다. 




아뜰리에 아키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갤러리에 있음)







코끼리인지 오뚝이인지 눈사람인지 보는 이의 상상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작품 [바람의 리듬을 타면 보이는]은 액체 고체 기체를 넘나드는 물입자의 유동성과 관련된다. 작품 [살포시 앉은 소리]에 나타나듯 어떤 가장자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는 구름은 보는 이의 상상과 밀접한 조형성을 가진다. 과학이 밝힌 사실에 의하면 ‘구름 한 덩이의 무게는 약 500~1000톤에 달한다...이렇게 무거운 구름이 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물방울들이 극도로 작아서 상승기류에 의해 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BBC sciencefocus, ‘과학이 밝혀낸 101가지 놀라운 사실들’ 중에서) 자유롭기에 더 자유롭게, 자연스럽기에 더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을 법한 구름을 정유미는 힘들게 그린다. 구름 속에 파묻혀야 구름이 제대로 그려진다. 그의 하루 작업량인 10시간은 그리기 노동과 그 노동의 가속이 가져올 비약이 모두 포함된 시간이다. 작업 시간의 총량은 집적된 노동이 행운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준다. 


정유미의 표현대로 ‘말랑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작업의 성패를 가늠한다. 몰입의 산물인 작품은 수없이 쌓인 붓놀림을 일회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가 밝힌 작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붓터치를 무한히 겹쳐 쌓아’ 만들어지는 형상은 ‘빠른 속도의 움직임이어야 가벼우면서도 부피감(동력)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직선이 아닌 곡선의 움직임을 따른다...대상에 대한 표면적인 재현의 방식이 아닌 소리를 향한 붓의 읊조림이라 할 수 있다. 그림 그릴 때, 균일한 호흡은 균일한 선의 겹침과 쌓임을 만든다...’ 예술은 물리적 대상을 정신화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좋은 영감이란 무엇이 되었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기만 하지 않겠다는 생명의 숨결이라고 말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좋은 영감의 원천은 생명이다. 생명은 ‘사실들의 외관에 의해 인식된 생명이 아니라 그보다는 형태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일종의 연약하고 유동적인 중심점’(데리다)이다.




정유미 Yumi Chung, 고요한 새벽 Serene Dawn, 2026, 장지에 과슈, 먹, Gouache and ink on Korean traditional paper (Jangji), 91 × 116 cm



정유미 Yumi Chung, 구름 폭포의 숨결 The Breath of a Cloud Waterfall, 2026, acrylic on canvas, 180 × 230 cm



정유미 Yumi Chung, 구름의 온기 The Warmth of Clouds, 2026, acrylic on canvas, 72 × 91 cm



작품 [호흡이 모여 길을 내어주듯이]처럼 흐름은 면면히 이어지지만 선적 연속성을 초월하는 웜홀같은 지역들이 있다. 그의 작품에 종종 보이는 구멍이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도약은 자연은 물론 자신의 그림조차 똑같이 베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의 그림에서 구름, 산, 바다, 폭포 등 그밖의 무엇이 연상되든 그것은 대상의 재현이 아닌 그 기운과 움직임에 관련된다. 그는 ‘동양화에서 중시여기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중 움직임을 뜻하는 동(動)에 주목한다. 보이지 않는 장력을 찾아, 자연이 본인을 끌어당기는 힘 또는 느낌을 찾아갔다. 이전에는 기운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움직임에 초점을 둔다.’ 정유미의 ‘기운생동’은 여린 싹의 솜털처럼 섬세하다. 그래서 동양화 관련 화론의 거창한 관념보다는 원초적인 감각에 호소한다. 소리는 물론 촉감과 온도, 심지어 맛도 상상된다. 재현이 아니기에 사전 스케치는 없다. 


재현이라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숨통이 트이는’ 작품이자, ‘온전히 무한대로 변화하는 상상풍경’을 향한다. 정유미는 그림으로 데뷔한지 올해로 20년이다. 내가 난지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난 때가 2008년이다. 그 이후 그는 유학에 국내외 레지던시를 경험하면서 스타일이 변화했다. 다소간 내향적이라는 작가는 낯선 환경이어야 비로소 변한다고 한다. 영국,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그리고 대전, 여수, 강릉에서의 레지던시는 초기의 사회풍자적인 그림을 자연으로 이동시켰다. 그는 청각이 예민한데, 주로 물이 가까이 있는 곳의 레지던시를 다니면서 영향 받았다. 최근에는 고성, 철원, 속초, 양양, 동해, 가평 등 높고 낮은 곳에 위치하며 물의 기운을 접했다. 물이 있는 곳에 산도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 걸친 구름도 보였을 것이다. 구름처럼 떠다녔던 자신도 투사됐을 것이다. 물의 기본은 고임이 아닌 흐름이다. 고임조차도 흐름의 결과다. 




정유미 Yumi Chung, 구름 우산이 되어 Becoming a Cloud Umbrella, 2026, 장지에 동양화물감 채색 Traditional color paint on Korean traditional paper (Jangji), 65 × 53 cm 



정유미 Yumi Chung, 물의 호흡 The Breath of Water, 2026, acrylic on canvas, 53 × 45 cm



정유미 Yumi Chung, 바람의 리듬을 타면 보이는 Revealed in the Wind's Rhythm, 2026, acrylic on canvas, 91 × 72 cm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가 [물의 역사]에서 정리하듯, ‘끝없이 진행되는 물의 순환은 이 세상 물의 97%를 차지하는 바닷물의 기화로부터 시작된다. 태양열로 기화된 물이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대리로 들어가 구름이 된다. 구름이 응축되면 물이 비나 눈의 형태로 다시 대지로 떨어져 물을 재공급한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은 예술가는 물론 철학자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자연의 4원소인 불, 물, 공기, 대지에서 물질적 상상력을 펼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과 꿈]은 물에서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운명’을 보았다. ‘유동성이란 언어의 욕망 그자체이다. 언어는 흘러가기를 바란다.’(바슐라르) 바슐라르가 물에서 본 ‘존재의 리듬’은 정유미에게서는 ‘유수음’과 같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사유에서 자연의 리듬을 듣고자 했다. 정유미의 화폭에서 구름은 자연의 외형이 아닌 그 방식을 따른다. 그렇기에 정지보다는 움직임이다. 회화이기에 잠재적 움직임이다. 


그의 구름은 실제의 묵직한 구름을 이루는 극도로 작은 물방울들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미세한 붓질을 통해 삶의 묵직한 중력을 삭감하고, 몽환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장으로 변모한다. 현실로부터 출발했지만 현실은 아닌, 즉 꿈같이 순수한 상상으로 비약한다. 작품 [물의 호흡]에 나타나듯 물의 입자에 상응하는 미세 붓질은 미시부터 거시에 이르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접힘과 펼침의 장이다. 작품 [봄의 자리]에서 부드러움과 부드러움이 만나는 포근한 자리는 만물이 발생하는 봄의 자리다. 작품 [안녕하신가요]에서 두 손을 든 아이같은 모습의 형상은 부드러움과 말랑말랑함으로 곧 다른 모습으로 바뀔 과정 중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아이는 인생의 봄과 같다. 작품 [구름 폭포의 숨결]에서 나타나듯, 자연이 순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구름과 폭포의 연관 고리는 분명하다. 폭포는 장대한 물줄기로 내리꽂힌 후 바다로 모여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만들어진다. 




정유미 Yumi Chung, 내려오는 소리가 물에 닿으면 As the Falling Echo Dissolves into the Water, 2026, acrylic on canvas, 85 × 116 cm



정유미 Yumi Chung, 살포시 앉은 소리 The Sound Softly Alighted, 2026, acrylic on canvas, 85 × 116 cm



정유미 Yumi Chung, 하얀 물결 White Waves, 2026, acrylic on canvas, 120 × 162 cm



상승은 하강에 비해 명확하지 않지만, 작가는 이 보이지 않는 흐름을 구름과 폭포의 연결로 보여준다. 구름이 있는 장소인 하늘에는 달과 해, 별같은 천체들도 있다. 작품 [빛을 품은 달]에서 달은 한 달을 주기로 변모하며 인력을 통해 지구의 물 운동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그의 상상풍경과 어울린다. 또한 이 작품은 장지에 동양화 물감으로 채색하여 담백함과 깊이를 동시에 실현한다. 작품 [해의 숨]에 나타나듯 수분이 많은 그의 풍경에서 해는 그 강렬한 빛의 발산이 약화되어 마치 달처럼 보인다. 해와 달의 분명한 경계선은 동양화에서 일월도도 연상시킨다. 정유미의 작품은 대체로 밝고 부드럽고 포근하다. 하지만 구름이 물리적으로든 상상으로든 수많은 형상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 이미지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작품 [구름 우산이 되어]에서 버섯 모양은 구름이 우산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폭발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심리테스트 얼룩처럼 보는 이의 심리가 투사된다면, 전쟁이 빈발하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가령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000배에 해당된다는 태평양의 비키니섬 원폭 실험(1954)에서 발생한 버섯구름도 그 하나이다. 인류문명의 종말을 앞당길 수 있는 그 실험은 구름 입자만큼이나 미립자인 원자 내부의 비밀을 알게 된 인간이 저지른 일이다. ‘유수음’의 작품들은 자연에 내재한 공(共)감각성을 살려내고자 한다. 작품 [구름 선율]처럼 미세한 선들의 흐름은 구름이 만들어내는 선율로 나타난다.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아래 쪽에서 봇물 터지듯 훅 퍼지는 작품 [내려오는 소리가 물에 닿으면]은 졸졸부터 콸콸에 이르는 여러 강도를 가질 물의 흐름이 내재한다. 그 소리는 다양한 파장과 겹쳐진다. 그의 작품은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은 물론, 시청각이 촉각과도 밀접함을 알려준다. 분자적 세밀함과 겹쳐지는 붓질은 미세모의 부드러운 촉각을 가진다. 




정유미 Yumi Chung, 빛을 품은 달  The Moon Embracing the Light, 2026, 장지에 동양화물감 채색 Traditional color paint on Korean traditional paper (Jangji),  27.3 × 22 cm



정유미 Yumi Chung, 포근히 앉아 Nestled Softly, 2026, acrylic on canvas, 53 × 45 cm



고도의 음감 체험에서 알려져 있듯이, 소리 또한 촉각적일 수 있다. 그때 소리는 입체적으로 들려오고 귀를 넘어서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가장 추상적인 시각적 감각은 청각과 촉각 같은 보다 하위의, 그러나 더 근본적인 감각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의 맹점을 극복한다. ‘유수음’이라는 전시부제는 구름이나 해와 달, 또는 옛그림의 이상적 풍경까지 저 멀리에 있는 초월적인 무엇을 가까이 잡아당기는 요소이다. 소리는 가까이에서 들리며, 근처에 음원의 존재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구름의 온기]를 전달한다. 작품 [포근히 앉아]에서 붓의 층이 많으면서도 얇은 화면은 포근하면서도 둔탁하지 않은 형상과 어울린다. 솜사탕이나 크림같이 달콤한 맛이 떠오른다. 맛은 그의 작품 속 공감각에서 또 하나의 추가 감각이다. 관객들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고요한 새벽]은 재현적 요소가 소통의 주요한 매개고리임을 알려준다. 그 맥락에서 보자면 작품 [하얀 물결]에서 관객은 파도의 끝자락 같은 하얀물결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작품 [고요한 새벽]을 보면 작가는 영감을 찾아 실제의 장소를 자주 찾아다닌다. 작품 [고요한 새벽]은 장지에 과슈와 먹을 사용했다. 장지에 동양화 물감으로 채색한 [피어오르는 물의 숨]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장관을 그린 옛그림의 풍경에서 영감받았다. ‘우연히 찾은 곳들이 고화에 나오던 명소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실제 철원 9경 중 제2경인 ‘삼부연 폭포’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철원의 ‘주상절리길’을 걸으며 힘있게 흐르는 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표현한 작품이 있다. 폭포의 외적인 형상보다는 물줄기의 흐름과 그 당시의 소리에 대한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낙하수의 힘이 강할수록 그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강력할 것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의 층보다 더 스며드는 재료는 풍경의 깊이를 더한다. 제목 속의 ‘숨’은 숨 쉬는 재료들과도 연관된다. 정유미는 동양화과 출신이지만 스스로의 변화를 위해서 영국 유학 때 아예 동양화 재료를 다 놓고 갈 정도였다. 




정유미 Yumi Chung, 피어오르는 물의 숨 Breath of Blooming Water, 2026, 장지에 동양화물감 채색 Traditional color paint on Korean traditional paper (Jangji), 65 × 53 cm



정유미 Yumi Chung, 호흡이 모여 길을 내어주듯이 As Breaths Gather to Open Up the Way, 2026, acrylic on canvas, 162 × 120 cm



하지만 자연은 그로 하여금 다시 모태 언어로 돌아가게 했다. 그는 ‘대상을 표현하는 기본 자세는 동양화의 관점을 따른다. 또한 작품의 표현 방식은 다양할지라도 표현의 기법은 동양화 채색 방식을 기본으로 한다. 예를 들어, 볼륨있는 표현을 할 때,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에 채색을 맑게 더욱 많이 덧대어 입체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정유미의 작품은 소재주의도 아니지만 탁상머리의 상상도 아니다. 하늘과 바다를 나누는 수평선과 그 사이에 인간의 자리일 수 있는 작은 섬, 그리고 그를 에워싼 대기와 빛의 느낌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라는 점을 말할 뿐이다. 그가 마음에 넣었다가 작품으로 빼낸 장소는 어디서부터 왔지만 그 어디에도 없다. 그의 작품은 자연만큼이나 예술 또한 필요함을 알려준다. 작가의 모든 노력은 단지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미적 목적이 아니라, 자연과 평행의 반열에 예술을 놓기 위한 예술가들의 오랜 추구와 관련된다.


출전; 미술평단 2026년 여름호-화랑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