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생명의 경계를 묻고, 문자에 담긴 포용을 읽다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 《경계는 울리고, 생은 넘친다》와 세종대왕상 원형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 전경

2026년 4월 개관한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은 조각가 김영원의 이름을 내건 작가미술관인 동시에 인간과 생명, 기술과 환경, 역사와 문자의 관계를 폭넓게 다루는 공공미술관이다. 김해종합운동장 내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지상의 체육시설과 지하 전시공간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 집단의 움직임과 신체 활동을 위해 조성된 장소 아래에서 인간의 몸과 생명, 문자와 소통을 사유하는 전시가 펼쳐진다는 점도 흥미롭다.


미술관 로비

미술관은 개관전으로 B5층에서 김영원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김영원: 형상을 넘어 울림으로》를, B4층에서는 기획전 《경계는 울리고, 생은 넘친다》를 선보였다. B3층에는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의 원형과 함께 문자와 쓰기의 감각을 다루는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가 마련됐다.

경계는 벽이 아니라 서로에게 반응하는 면
B4층 제2전시실에서 열리는 《경계는 울리고, 생은 넘친다》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계, 생명과 물질 사이에 놓인 경계를 질문함과 동시에 김해라는 장소의 역사와 환경을 전시 안으로 끌어들인다. 여러 참여 작가는 김해와 경남 지역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다. 전시를 기획한 최윤정 큐레이터와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나누었다.

Q. 김해라는 지역의 역사와 환경은 전시에 어떻게 반영됐습니까?
“여러 작가가 김해의 시간과 장소를 직접 조사하고 신작을 제작했습니다.”

권민호, 〈불의 구조, 왕관의 단면〉, 2026, 단채널 영상, 모니터 외, 가변크기

권민호는 김해의 고대사에서 근현대 산업화, 미래의 도시계획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여러 이미지의 층으로 구성했다. 불과 철, 풍요를 상징하는 물고기 등 김해의 역사와 연결되는 이미지가 작품 안에 중첩된다.


김도희, 〈바다뱀 여섯 배꼽〉, 2026, 가변크기

김도희는 경남 지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라가야 고분의 천장석에 새겨진 고대 별자리 ‘남두육성’에 주목했다. 물과 생명, 봄을 상징하는 여섯 개의 별을 종의 형태로 구성하고 사람들의 배꼽을 본뜬 형상을 범종 장인과 함께 제작했다. 기획자는 “관람객이 종을 울리면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배꼽들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며 “그 소리가 김해의 땅속에 머물고 있을 신화적 생명체와 공명한다는 상상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권혜원, 〈당신의 발 아래〉, 2026, 3채널 영상, 가변크기

권혜원은 김해의 발굴 현장과 고고학자들이 사용하는 도구, 유물이 발견되기까지 필요한 긴 시간을 조사했다. 인간이 남긴 문자 기록뿐 아니라 유물에 붙어 있는 미세한 물질을 통해서도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작업이다. 이 작품은 국립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 경주 월성 발굴 현장의 연구자와 물질분석가들의 협력을 통해 완성됐다. 고고학적 발굴은 과거의 완성된 이야기를 찾아내는 과정이라기보다 흙과 파편, 미세한 물질에서 가능한 역사를 추론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김해는 이 전시에서 단순한 개최지가 아니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재료이자 시간의 지층이며, 인간과 비인간의 흔적이 축적된 살아 있는 환경으로 등장한다.

Q. 전시 제목인 ‘경계는 울리고, 생은 넘친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이 전시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계, 물질과 감각처럼 서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해 온 존재들의 경계를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그 경계는 완전히 닫혀 있는 벽이라기보다 서로의 움직임과 진동에 반응하며 울리는 면에 가깝습니다. 생명 역시 고정된 형상이나 개체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환경, 기술과 관계를 오가며 계속해서 넘쳐흐릅니다. 전시 제목을 들은 한 작가님은 ‘제목에 생명력이 있다’고 말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가장 오른쪽) 정정엽, 〈나의 묘한 벌레들〉, 2023, 광목천 위에 아크릴릭, 300×156㎝

Q. 이응노의 〈군상〉이 놓인 공간을 ‘광장’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응노의 〈군상〉이 있는 곳은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되는 광장과 같은 공간입니다. 수많은 인간이 모여 있는 〈군상〉은 연대와 집단의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주변에는 곡물과 씨앗이 가진 생명력을 다룬 작품과 제주4·3의 희생자를 3만 개의 형상으로 표현한 작품 등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이 광장에서는 인간이 함께 모이고 연대하는 에너지를 먼저 마주하게 됩니다.

양정욱, 작품 섹션

Q.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 많습니다. 기술 자체만 부각되지 않도록 어떤 점을 고려했습니까?
“아트테크나 첨단기술을 활용했다는 사실만 앞세우기보다는 각각의 작품에 분명한 서사와 형식적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기술 자체를 과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기술은 인간이 무엇인지 되묻는 매개이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흔드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집중했습니다.

노진아의 로봇은 관람객과 음성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자신이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는 마치 인간의 조건을 묻는 피노키오의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팀보이드의 작품에서는 기계가 일기를 쓴 뒤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을 스스로 지운다. 관람객이 읽을 수 있는 것은 내부의 맥락이 제거된 정보뿐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기계를 통제한다는 익숙한 구도를 뒤집고, 오히려 인간에게 닫혀 있는 기계의 내면을 상상하게 한다.

Q. 관람객은 이 전시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면 좋을까요?
전시장에서는 인간뿐 아니라 식물과 물질, 기계와 역사까지 저마다의 시간으로 움직입니다. 모든 작품의 의미를 한 번에 해석하려 하기보다 공간을 천천히 조망하며 작품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홍이현숙의 〈버드나무가 돌아왔다〉는 사라졌던 버드나무가 물새를 통해 다시 씨앗을 퍼뜨리고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이 계획하거나 통제하지 않아도 식물과 동물은 서로의 생존에 관여하며 생명의 순환을 이어간다. 셰자드 다우드의 영상은 인간이 만든 전쟁과 폭력, 자원 분배의 갈등 속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김윤철의 작품에서는 눈에 즉시 드러나지 않더라도 빛과 온도, 관람객이 만든 환경에 따라 물질이 조금씩 변화한다. 

관람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외부의 구경꾼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 가까이 다가가고, 종을 울리고, 움직이며, 빛과 온도에 변화를 만드는 순간 전시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존재가 된다.


광화문을 떠나 김해에서 만난 세종대왕상
B3층에서는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김영원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각과 회화 등 250여 점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은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 건립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청동상이 도시의 풍경과 국가적 상징 속에서 감상된다면, 미술관에 놓인 원형은 조각가가 한 인물의 자세와 표정, 의복의 주름과 손의 위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 가까이에서 살펴보게 한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원형

세종대왕은 근엄하게 권위를 과시하기보다 펼쳐진 책을 들고 백성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모습으로 형상화돼 있다. 규모와 정면성은 왕의 상징성을 유지하지만, 열린 책과 안정된 자세는 군림하는 권력보다 지식과 소통의 의미를 강조한다. 세종대왕 동상은 높이 약 6.2m에 이르는 광화문의 최종 청동상과 달리, 미술관에서는 조각이 탄생하기 전의 원형으로 관람객을 만난다. 완성된 기념비의 웅장함보다 조각가의 손과 구상이 남아 있는 제작 과정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글자는 어떻게 감각이 되는가
세종대왕상 옆에서 열리는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는 문자와 쓰기를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라 손과 몸, 재료와 도구가 결합하는 감각적인 행위로 바라보게 한다. 글자는 머릿속의 생각을 투명하게 옮긴 결과만은 아니다. 붓과 먹, 펜과 종이, 자판과 화면 등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문자의 형태와 속도, 흔적은 달라진다. 쓴다는 것은 생각을 기록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손의 움직임과 재료의 저항을 경험하는 신체적 활동이다. 이는 누가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가, 누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가라는 동시대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작가미술관을 넘어선 공공미술관의 가능성
김해시립김영원미술관은 김영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시를 층별로 따라가다 보면 미술관이 한 작가의 업적을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김영원의 인체조각이 던지는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은 《경계는 울리고, 생은 넘친다》에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물질, 자연과 기술의 관계로 확장된다. 세종대왕상 원형이 환기하는 애민과 소통의 의미는 《글(자)감(각)》을 통해 문자와 도구, 표현과 접근의 문제로 이어진다.


《김영원: 형상을 넘어 울림으로》 전시전경

세 전시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다만 이곳에서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 홀로 서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른 생명과 물질, 기술과 환경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자와 예술을 통해 경험을 나누는 관계적 존재다.

전시 정보
《김영원: 형상을 넘어 울림으로》 | 2026.4.4–10.11 | B5층 제1전시실
《경계는 울리고, 생은 넘친다》 | 2026.4.4–8.16 | B4층 제2전시실
《글(자)감(각): 쓰기와 도구》 | 2026.4.4–11.1 | B3층 제3전시실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로 243, 김해종합운동장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