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의 학교
이선영(미술평론)
2026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예술 학교: 우리가 서로의 학교가 될 때,》는 삶과 예술의 장에서 각개 전투하는 개성 있는 단체들이 모여 미술관을 또 다른 학교로 만든다. 학교란 대개 지식이 전수되고 취업으로 이어질 주요 경력으로 남는 과정으로 기대되지만, 50여일 간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 ‘예술학교’는 동등한 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각자 이미 해오던 작업들을 재검토하고 업그레이드하려는 목적이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생적으로 활동해 온 문화 생산자들의 연결망을 한 겹 더 함으로서 문화생태계에 활기를 도모하고자 한다. 여기에서의 ‘예술 교육’은 백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과정의 변곡이나 가속이다. 이번 예술학교에는 8팀, 총 42명의 예술인이 참여했다. ‘참여 작가는 동인, 콜렉티브, 스튜디오, 미술공간, 학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왔다. 부대 행사 중 워크숍이 제일 많았고, 렉쳐와 워크숍, 발표회, 토크, 잡담회, 집담회, 게더링 등 다양한 형식으로 모임이 이루어졌다.
아르코미술관 1층 전시전경, 행복반의 그림들, 조각들, 드로잉들과 김지원의 작품(자료 출전; 아르코미술관)
미술관은 완성품이 놓인 공간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를 작업이 진행 중인 장이 되었다. 전시는 작품만으로도 다른 작가나 관객에게 영향을 주지만, 어떤 경우에 영향 관계를 더욱 직접적으로 고무하는 계기도 있을 수 있다. 아르코 1, 2층에 걸친 전체 공간에는 작품을 포함한 자료 중심의 배열이며, 참여자들이 참고하고 생산한 것이 동시에 나와 있고 QR 코드 등을 통해 오프라인 공간을 넘어서는 연결망이 제시된다. 일종의 인풋과 아웃풋이 나란히 있는 셈이며, 그 중간 과정도 노출된다. 그래서 전시 준비 중인가 하는 느낌의 다소간 어수선한 분위기는 피할 수 없다. 전시장 곳곳에 참여자들이 둘러앉을 자리가 있고 진행 중인 작업이 있으며, 기간중에 현장에서 모여 토론하고 있는 한두 팀 정도는 직접 만날 수 있을 만큼 관련 프로그램도 빽빽하게 포진돼 있다. 이 과정은 서로 간에, 그리고 관객을 행해 열려 있다. 참여 단체들이 그러했듯이 우연적 만남 또한 중요하다.
1층과 2층에 걸쳐 펼쳐진 프로젝트/작품/자료에는 대안적 공간 운영부터 드로잉, 만화, 판화, 디자인, 문자 및 디지털을 매개로 한 학습과 공유, 학회, 비평, 기획 등 다양했다. 각 단체에 대해서는 그들이 직접 소개한 내용을 참고해서 간략하게 말하겠다. [모크캠프]의 박주연은 ‘혜화동 전셋집의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를 집이 아닌 모두가 점유할 수 있는 미술 공간으로 전환했다.’ 이는 사회 초년생인 청년에게 닥친 어려움을 되받아친 예로,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자생적 단체/공간의 활약상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 ‘개방형 공간은 일시적으로 모크캠프의 능동적 운영자 및 동료가 되길 제안’한다. [행복반]은 드로잉을 매개로 6인의 회화 작가들로 만난 사이로, ‘매일 드로잉을 하고 매달 모여 각자의 드로잉북을 펼쳐 보이며 작업에 대해 질문하고 응답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이들의 모범이 된 작가는 박이소, 김지원 등이라는 점은 작품을 완성형이 아닌 과정형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드로잉은 영감의 인큐베이터부터 그 자체로 작품일 수 있는 종합적 역할을 한다.
만화에 관련한 창작과 비평 모임 [쿠로다], 재료와 기법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판화 동인 [머터리얼 라이브러리], 자생적 학습 생태계를 구축하는 커뮤니티 [버드콜], 텍스트 파일 기반 디지털 공유 공간으로 전시와 작가, 관객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아트아트아트. 위키.]의 작품/자료들도 풍성하다. 배움의 근간인 말과 글을 활용해 언어와 기록을 매개로 배움의 태도를 제안하는 [PIE], 도시에 출몰하는 쥐처럼 틈새를 오가며 미술 현장과 그 조건을 글쓰기로 드러내는 유사(類似)학회 [학회쥐], 미술비평을 공부하기 위한 소규모 모임으로, 2016년부터 온라인에 미술 관련 글을 게재하였으며, 2022년부터는 오프라인 공간인 YPC SPACE를 운영하고 있는 [옐로우 펜 클럽], 큐레이팅을 매개로 동시대의 창작과 교육이 만나는 지점을 탐색하는 학교 실험 큐레이팅 스쿨 서울의 여러 작업이 나와 있다. 단체들 간의 협업도 있다. PIE ×모크캠프의 전시 사전 프로그램부터, ‘글이라는 공통의 매개를 두고 관객과 글을 교환하거나 읽고 쓸 수 있는 테이블을 마련’한 옐로우 펜클럽과 학회쥐의 협업이 그것이다.
아르코 미술관 2층 전시전경
참여한 단체들의 면면은 10여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력도 보이지만, 대개 시작 단계의 청년 작가/기획자들이다. 그 점은 상호작용의 기회와 효과가 더 밀도있고 강도있게 진행됐음을 말한다. 청년의 정체성은 왕성하게 흡수하고 변모하는 유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개 중장년층이 되면 청년 시절의 모색 중 몇몇을 가다듬어 자신의 대표 스타일로 내세워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지는데 활용하곤 한다. 청년 시절에 열심히 했던 이들은 이후에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예술에 있어 청년기는 특히 중요하고 나머지 인생도 청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잠재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기다. 사회는 더 잘 조직화되고 예술을 위한 뒷받침도 많이 하는 듯한데, 여전히 힘들거나 더 힘든 것은 왜일까. 예술뿐 아니라 전 분야에 걸쳐 사회의 시스템화가 오히려 청년들의 문턱을 더 높이는 역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투자는 안 하고 열매만 거두려는 자본의 생리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나름대로 투자는 하는데 결국은 해당 기관의 알리바이를 위한 사업의 피상성 때문은 아닐까. ‘자기조직화’를 강조하는 참여자들은 일회성 사업에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것들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는다. 가령 ‘매 학기 10여 명의 코어 멤버를 선정할 때의 기준’이 ‘미술 분야의 경력이나 학력이 아니라 무엇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하는 [큐레이팅 스쿨 서울]은 ‘자기조직화’를 실천하는 예다. 협업과 공동창작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은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 예술학교는 50여 일 이 지난 이후도 뿌리줄기같은 상호작용을 이어갈 것이다. 참여자들은 이미 물밑에서 왕성한 자기조직 활동을 하고 있던 팀들이다. 이번 건과는 별개 사안이지만, 전시 기회를 포함한 공적인 지원은 이미 잘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 잘하라는 맥락으로 주는 것이 맞다. 미지의 것을 다루는 예술은 처음이나 최종 목표보다는 중간 과정의 가속이 중요하다.
참여자들은 ‘자기조직화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인들의 삶의 방식이자 대안적인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관객들도 읽어볼 수 있는 참여자들의 어록--‘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상상하기. 그리고 타인이 상상하는 세계는 무엇일지 궁금해하기. 그렇게 서로의 세계를 나누고 함께 몰입하기’(쿠로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창작을 지속해야 하는 동력과 동기를 공유하고 연대하는 곳 혹은 모임’(머터리얼 라이브러리)--은 이번 행사에서 그들의 기대치를 말해준다. 한국에서 작가 활동하는데 유난히 긴 가방끈이 요구되고, 물심양면으로 투자 가능한 이들이 아니라면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미술관에서의 ‘예술학교’는 참여 기록이 남긴 하겠지만, 졸업장과는 상관없는 학교 밖의 학교인 셈이다. 1970-80년대 우리 사회를 주름잡던 양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지쳐 그 사이에서 돌파구를 찾던 1990년대에 ‘학교 보다 학교 앞’이 더 재미있었다는 회고를 하는 작가들이 꽤 있다.
아르코미술관 2층 전시전경
‘예술학교는 제도의 바깥에서 자생적으로 예술 실천을 이어가는 예술가와 집단적 주체, 그 활동이 만들어 나가는 연결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이러한 기획이 펼쳐진 것은 한때 미술관이 운영했던 인사미술공간(2000–2025)에서의 신진작가 프로그램의 경험이 깔려있다. 예술처럼 언제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 알 수 없는 기획이 추진된 것은 공적 기관으로서 장기적인 비전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당시에 공모로 지원되고 선정된 신진 작가들이 작가노트 작성부터 포트폴리오 발표, 전시와 리뷰까지 이어지는 작업은 학교와 현장 사이의 공백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했다. 여러 단계의 ‘자아비판’으로 서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자기 작업을 객관화시키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미술 활동을 지속하는데 동료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특히 이번 예술학교는 작가와 기획자가 같이 참여했기에 이후에도 이어질 인연에 대한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