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시간과 공간
이선영(미술평론)
가로x세로 약 30cm의 PET 필름지에 아크릴로 그린 [도림 세경]은 심효선의 작품의 면모를 집약한다. 이 정사각형 ‘풍경’은 모듈처럼 작동되면서 전시 장소에 따라 가변적으로 설치된다. 낱장들 사이에 형태나 색감의 연결도 있고,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리드 형식으로 배치된 수백장의 세부가 모여 또 다른 풍경이 나오지만, 전체 풍경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프랙털 도형은 같은 단위가 규모를 달리하며 무한히 반복되지만, 심효선의 부분들은 모두 다르다. 한 장 한 장이 모두 손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가 아닌 각개격파 식으로 작업한다. 경관의 조망이 아닌 단편을, 그것도 더듬어가는 방식은 촉각적 세부를 강조한다. 세부가 꿈틀거리면서 또 다른 풍경으로 변모하는 그의 작품은 초근접 시점을 유지한다. 물의 반사면이 자주 등장하는 화면은 보이는 장면들을 찢어 섞어버린다. 화면에 담긴 단편들의 가장자리는 불규칙하여, 자연의 퍼즐은 영원히 맞춰지지 않을지 모른다.
도림세경(일부),필름지에 아크릴, 각 29.7cmx29.7cm,.2026
도림천을 포함하여 그가 경험하는 도시의 장소는 ‘머물지 않고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시적이고 파편적이다.’ 일시성과 파편성, 불확실성은 현재에 대한 주목의 결과다. 그의 최근 개인전 제목들은--《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2023), 《전혀 다른, 하지만 다를 바 없는》(2021)--모두 선형적 시간에 대한 부정을 내포한다. 작품의 낯섦은 선적 인과성의 단절 때문이다. 이러한 단절은 최초의 신선함으로의 복귀나 파편적인 시간의 충만함을 향한다. 심효선의 이전 개인전 부제 《오늘의 장소가 어제와 같을 수 없고》(2023)에 나타나듯 현재적 시간에의 몰입은 공간의 이질성을 낳는다. 수변 풍경은 모네 말년의 수련이 추상미술로 귀결된 미술사의 예도 떠올려진다. 그의 작품에 반영 상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 근접 시야를 통해 풍경을 넘어 회화의 표면과도 중첩되는 자연의 면모를 포획하는 점도 초창기 모더니즘의 어법이다. 도림천은 정원의 연못처럼 자연과 인공 사이에 있는 무엇이다.
‘도로 밑의 그늘진 복개 하천변은 자동차가 다니는 고가와는 달리 축축하고 느리다. 나와 평행하게 흐르는 도림천은 얕고 잔잔하다...가로수와 공원, 도림천 변을 자연으로 볼 수 있을까. 필요에 의해 설계되고 재구성된 수변은 자연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모방하고 재현한 장소다. 땅과 하늘을 품은 하천은 자연의 우글거림을 원근감 없이 납작하게 펼친다. 물과 공기가, 나무와 하늘이 요란하게 휘날린다...’ 그는 단편에 맺힌 중층적 표면을 그린다. ‘표면도 여러 층이 쌓여 만들어진 깊이를 가진다. 높이를 가진 껍데기를 상상해 본다.’ 백년 넘은 모더니즘 이후 도시를 관통하는 자연은 여러 부대장치의 결합으로 정원의 연못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그곳은 더 이상 대우주를 반향하는 자족적인 소우주의 상징이 아니다. 이상적인 생태학의 관점에서 총체적인 유기적 질서를 찾기도 힘들다. 파편성의 위상에 관해서는 리얼리즘(루카치)과 모더니즘(브레히트)의 오래된 미학적 논쟁이 있었고, 그 대화는 지금도 버전을 달리해서 지속된다.
옆으로 흐르고 아래로 비치고_2026_캔버스에 아크릴_259.1×775.6cm
도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인공하천은 현대적 일상성의 무대가 된다. 심효선의 작품은 그 무대를 소재로 현대성의 단면을 포착한다. 앙리 메쇼닉은 [모데르니테 모데르니테]에서 현대성은 삶에 대해 우리가 갖는 관계라고 하면서, 동시대인은 끊임없이 현대성을 추구한다고 본다. 그러나 항상 현대성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현대성은 현재에 있는 미래적 부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대성은 현재의 변형능력이다. 기호의 불연속에 대한 리듬의 연속성, 현대성은 그 연속의 재발견이다.’(앙리 메쇼닉) 심효선의 작품은 전후의 관계를 함축하는 단면이 아니라, 중층적 표면이다. 공간적 명확성이 아니라 시간적 추이에 따른 불확실성이 두드러진다. 코드에 전형적인 얇은 표면도 본질/현상의 이분법에 근거한 깊이의 모델도 아니다. 작품의 복잡성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면모다. 시점이 확보되지 못한 어질어질한 풍경은 정교한 규칙에 의해 흘러가는 듯한 도시적 삶의 빈칸과 부조리의 자리다.
도시 안에 자연을 부활시킨다는 큰 그림은 아귀가 맞지 않은 모서리들이 주섬주섬 모여있는 양상이며, 여러 지자체의 관할하에 놓인 도림천은 꼴라주적인 양상을 띈다. 시간이 지나면서 틈은 더욱 벌어진다. 작가는 그 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주목한다. 열심히 그려도 빠져나가는 자연에 여지를 남기기 위해 설치 때 한 귀퉁이를 띄워놓아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움직이게 했다. 하나의 풍경처럼 보이는 연작도 간격을 띄어 건다. 그가 회화의 틀로 잘라낸 세부는 수많은 요소들이 중첩되고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작가의 감각과 필력으로만 진행된다. 그가 표현하는 장소가 물가라는 점과 그의 매체인 물감이 질척하게 흐른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대상의 반영이나 주체의 표현을 넘어서 양자의 수렴을 향한다. 그에게 그리기는 ‘파편적이고 유동적이며 일시적인 감각을 그리기의 운동성과 연결하여 꿈틀대는 살아있음과 연관하는 과정’이며, ‘그 장소를 떠올리며 다른 공간을 걷는 붓의 자국 남기기와 같다.’
납작하게 우글거리는_2025_캔버스에 아크릴_ 145.5x97cmx4점
그는 이번 전시에서 ‘꿈틀거림과 연결된 작은 붓질의 연동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한다. 심효선이 도심하천을 발견한 것은 육체 활동이 계기가 됐다. 자전거를 타고 집과 작업실 사이를 매일 50여분씩 다니던 작가는 어느 날부터 자전거에서 내려 자신과 함께 흘러가던 도림천을 다시 보았다. 바쁜 일상을 통과하기 위한 배경에 불과했던 물과 그 기슭은 그에게 미지의 세계로 다가왔다. 이러한 발견은 그의 작품에 여러 생명체가 지글지글 모여있는 듯한 기이한 생동감으로 나타났다. 자체적으로 꿈틀대는 듯한 그의 풍경은 동물성으로 다가온다. 아니, 식물과 동물로 분화하기 이전, 생명이 탄생한 걸쭉한 원시 스프에서 발생하는 단계가 아닐까. 창세기와도 같은 그 순간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은 창조와 비교되어 왔다. 옥타비오 파스는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에서 최초의 사회란 역사시대 이전의 사회를 의미한다고 전제하면서 현대예술이 시원으로 회귀하려 한다고 말한다.
‘역사는 생산의 축적과 소유에 근거한 불평등의 시작이며, 시원적 사회로의 복귀란 단순히 퇴행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말한다. 근원으로의 회귀란 바로 현재로의 회귀를 말한다. 혁명을 뜻하는 프랑스어 revolution은 되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revolvere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천체의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주기적인 복귀를 나타내는 혁명이란 단어는, 단절이라는 말이 되어 영원한 전진 속에 미래를 열어 주었다. 예술에 필요한 것은 근대의 역사주의가 말하는 진보 내지 혁명, 즉 시간의 끝을 향한 현재의 유예가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영원이란 바로 현재이며 현재가 영원이기 때문이다.’(옥타비오 파스) 혁명을 표방하는 현대미술은 구상과 추상, 전체와 부분 등의 구분을 넘어서는, 또는 그 이전의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새 작품을 할 때마다 새 화폭을 마주하는 작가는 그러한 최초의 혼돈과 기꺼이 직면한다.
흘러가는 후두기는_2025_캔버스에 아크릴_193,9x259.1cm
붓을 들기도 전에 화폭을 미리 점거하고 있는 모든 코드들을 걷어내고 싶은 욕망은 혼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의 어떤 작품은 추상이라고 해야 할 만큼 대상이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출발점은 있다. 전시제목 (도(도(되미)야미)림)은 도림천의 유래가 된 옛 마을의 이름들인 되미와 도야미로 구성한 조어이다. ‘(도(도(되미)야미)림)은 마트료시카 구조를 시각화한 제목으로, 도림 안의 도야미 안의 되미를 통해 단일 시점으로는 포착 불가능한 역사성-자연과 문명의 층위와 에너지를 암시한다...자음 ㄷ과 ㅁ이 반복되는 옛 마을의 이름들은 시각적 리듬과 운율을 가진다. 언어의 시각적, 음성적 특징을 통해 지형의 이름에 그치지 않고 장소가 갖는 비구상적이고 다층적인 특성을 은유’한다. 그의 작품 속 난데없는 타원형들처럼 난반사하는 시청각적 감각을 내포한다. 한편 정확한 지시대상을 괄호에 넣는 전략을 암시한다. 대상은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작동된다. 해체주의식으로 말하자면 ‘말소하에 놓는’ 전략이다.
그것은 회화를 재현된 대상과 의미로 환원하는 관례를 극복하고 차이와 연기의 무한한 유희를 위한 현대미술가의 방식이다. 그가 여러 개의 괄호 안에 교란시켜 놓은 단어에는 도림천이라는 지명이 깔려있다. 그가 그림의 환영이 주는 효과를 믿지 않는 바도 아니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된 고해상도 스펙터클의 시대에 회화 또한 지속적인 재조정 과정이 있었다. 노동도, 지식도, 그 객관적인 존재 의미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화가 또한 ‘왜 그림으로 그리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해 갈 수 없다. 여러 매체가 회화에 주었던 영향은 보이는/보이지 않는 차원을 막론한다. 그의 작품은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붓질의 궤적이다. 하지만 멀어짐이라는 부정어법이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하나 회의에 붙여진다 할지라도, 작가가 기어코 찾아내야 하는 것은 어떤 긍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을 베껴내는 기계적 반복만큼이나 코드화된 추상과 거리를 둔다.
조용히 요란한1, 캔버스에 아크릴, 33.4x45.5cm, 2025
조용히 요란한2, 캔버스에 아크릴, 33.4x45.5cm, 2025
굳이 미술사와 비교하자면, 그의 작품은 추상이 발생하는 순간과 밀접하다. 아직도 초창기 모더니즘만큼의 대중적 사랑과 공감을 받는 보편적 미술 사조가 없다는 것은 단단하게 굳어지기 전의 잠재력이 예술의 핵심에 있음을 알려준다. 심효선의 작품 구석구석에는 코드로 굳기 이전의 물컹한 세계들이 발견되며, 이는 고정되고 완성된 현실 이전의 것이다. 혹은 그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다. 세계를 이루는 관념적 구조로 귀결된 ‘차가운’ 추상이나 마음가는 대로 손가는대로 자유롭게 그린 ‘뜨거운’ 추상이 아니라, 재현 자체에 내장된 불확실성의 요소를 극대화하는 과정 중의 예술이다. 그에 상응하는 주체 또한 꿈과 무의식, 감성에 민감한 과정 중의 주체다. 작품 [납작하게 우글거리는]은 사냥 중인 새가 있는 장면을 여러 개의 패널로 이어서 전시한다. 장면이 이어지기도 하고 각각을 떼어 놓아서 스펙터클하게 볼 수도 있지만 각 장면으로 자족적일 수 있다.
수면에 비치는 수변식물, 새의 반영상은 물결의 흐름을 따라 제목 그대로 ‘납작하게 우글거리는’ 중이다. 그들은 공기나 물의 움직임, 작가의 감성과 붓질에 따라 ‘원래의’ 형태를 일시적 상태로 변환한다. 그림의 조건인 평면과 물의 반사면에 담겨진 여러 이미지들이 울렁거리며 수렴한다. 그가 본 것을 그림으로 옮긴다기보다는, 화면을 수면 삼아 붓으로 일렁이게 한다. 어떤 작품은 그 휘적거림이 매우 강하고 어떤 것은 대상을 대략 통과시킨다. 자주 보지 않는 특이한 것들의 경우 후자의 태도가 견지된다. 원래 재현이란 그것을 통해서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물이나 식물 같이 이미 익숙한 것의 불투명성은 크다. 대상은 괄호쳐지고 흔적으로 와해된다. 심효선의 그림은 최초의 영감을 자기 언어로 반복한다. 차이를 둔 반복은 재현이 아니다. 재현은 한번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반복은 계속될 수 있다. 재현의 기준은 정확함과 투명함이지만, 반복의 동인은 계속되는 이끌림과 회귀의 필연성이다.
아주작게꿈틀대는, 캔버스에아크릴, 40.9x53cm, 2025
요즘 주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기계를 대입하자면, 기계는 재현하지만, 인간은 반복한다. 재현의 어법인 원근법이 발견된 초창기부터 (원시적 형태의) 카메라 같은 기계적 장치의 개입이 있었다. 재현에 비해 반복은 비효율적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철학자나 과학자, 예술가가 되기 위한 여러 교육 과정을 생각해 보라. 이미 기계는 축적된 정보를 즉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 기계에 부재한 몸은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의식보다 더 빠르거나 느린 몸은 무의식과 감성의 원천이다. 회화 작업에서는 작가가 몸으로 받아들인 핵심만 반복된다. 작품 [아주 작게 꿈틀대는]의 화면은 일렁이는 부분 반영상을 모은 것으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의 전모를 알 수는 없는 와중에 붓은 단편의 흔적을 담는다. 대상들로부터 출발했지만, 그 인상과 흔적만 남는다. 통상적으로 명확한 외곽선을 가진 형태는 의미의 출발이 되지만, 과정으로 와해된 상태에서 작품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에도 존재하는 이 모호한 과정들을 담아내는 유력한 매체를 회화로 삼는 이가 바로 화가이다. 예술이 없다면 삶의 모호함은 그저 모호하게 흘러가 버리고 만다. 경계와 의미로부터 벗어난 형상은 아직 무엇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 있다. 작가에게는 그림이 아니라면 그 과정을 담아둘 기회가 없다. 작업에서 순간순간 접하기도 하는 희열은 자연에서의 감흥에 상응한다. 그가 출발한 자연은 낭만주의적 환상과 달리, 온갖 파편이 함께 하는 순수하지 않은 대상이다. 그 이질적인 것들은 현실, 몸, 물질 등에서 흘러나온 것이며, 마치 엔트로피의 법칙같이 역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화폭은 여러 현실에서 풀려나온 에너지가 잠시 모양새를 갖추는 장이다. 작품은 대상을 안전하게 담아 전달하는 그릇이 아니라 내용물이 쏟아지는 깨진 그릇이다. 그때마다 쏟아진 양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은 모든 현실에 해당된다. 단단함과 유동성의 관계는 단지 상대적일 뿐이다.
탈피_72.7x60cm, 캔버스에아크릴, 2024
자연은 무질서한 듯해도 질서가 있다. 인간 사회는 질서정연한 듯해도 그렇지 않다. 그림이라는 오래된 전통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작품 [도림천의 왜가리]는 그의 작품에서 드물게 대상이 (상대적으로)확실하고, 제목 또한 그것을 확인해 준다. 하지만 어느 부분은 여전히 불확실해서 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전에 도심의 하수도나 건천으로 있던 길이 생태하천으로 복원되면서 찾아온 물고기나 새는 신기하다. 왜곡이나 변형만큼이나 그자체로 놀랍고 새롭다. 공룡의 후예인 새는 흐물거리는 원초적 자연에서 격세유전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 작품 [탈피]에서 껍질을 벗고 다시 탄생하는 탈피의 흔적은 자연의 신비를 전한다. 무엇이 나오고 사라져도 모를 복잡한 화면은 작가가 목도한 사건 현장이다. 화면에 가득한 우글거리는 에너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과정의 일면이다. 작가는 작다면 작은 생명의 과정에서 휘몰아치는 우주가 떠오르는 형상을 배치했다.
작품 [탈피]는 지구의 탄생 이래 벌어지고 있는 생명의 이어짐, 그 과정에 편재하는 크고 작은기적들이 깔려 있다. 작품 [p7]는 어떤 정보도 없는 제목에서 관객은 물, 빛, 식물 등이 한순간에 만든 장면을 추상으로 보게 된다. 수면은 화폭의 상징이기도 했던 거울이나 유리창처럼 단단하지 않다. 자연적 조건이 만든 일렁임은 대상의 색과 형태를 뒤섞고, 붓질은 그때의 감각을 행위로 되살리는 과정이다. 그는 물감 발린 붓 또한 액체적이고, 수변의 통과는 두 발이나 두 바퀴로 했기 때문에 화폭을 바닥에 깔고 작업하기도 한다. 그것은 눈으로 본 것을 개념으로 소화하기 보다는, 몸적 체험을 또 다른 몸적 체험으로 평행 이동시키는 과정이다. [물그림자] 시리즈에서 움직이는 거울에 비친 단편은 그림 안의 초록 색감을 통해 자연의 흔적이 찾아진다. 시리즈는 이어지는 풍경이지만, 작가는 간격을 둔다. [물그림자 1]은 도심 인공하천의 구조물이 비교적 정확하게 보인다.
물그림자 3, 27.3x22cm, 캔버스에 아크릴, 2024
물그림자 4, 27.3x22cm, 캔버스에 아크릴, 2024
물그림자1, 60.6x50cm, 캔버스에 아크릴, 2024
노후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의 물이나 식물과 같이 시간의 흐름을 각인한다. 일렁이는 가운데도 인공구조물과 자연물의 차이는 감지된다. 대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조형적 언어의 자율성을 전제하는 추상은 그의 목표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추상화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자유로운 붓질이 미지의 실재로 응집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이 끝없는 과정은 열락이자 고통이기에 작가는 때로 타이머를 맞춰 놓고 작업하기도 한다. ‘도림에서 시작한 그리기는 도림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도착지도 모른 채, 처음 가보는 길을 걷는 것 같아 멈춰야 할 때를 알기 위해 그리는 시간을 정했다. 타이머를 켜놓거나 음악을 틀거나 초에 불을 붙인다.’ 각 작품은 그가 정한 시간까지의 기록인 셈이다. 작품 [물그림자 5]는 초록과 시멘트의 반영상을 담은 흐름이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가늠할 수 없는 세부의 선택은 대상으로부터 시작된 작업도 애매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 흔적은 매우 동적이어서 파괴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인간이 정해놓은 경로를 따라 얌전히 흐르던 물은 생성 및 해방 뿐 아니라 파괴의 잠재력 또한 가진다. 2025년 개인전 [물낯]에서 그는 물에 얼굴의 위상을 부여한다. 작은 면적에 수많은 표정을 간직하는 얼굴은 그가 접하는 자연의 조그만 징후도 포착하고 싶어하는 이의 바램이다. 낯은 고정되지 않는다. 고정된 낯 또한 재앙 아닐까. 코드화된 세상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바로 고정이다. 고정은 상대를 알고 지배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작품 [흘러가는, 후드기는]에서 흐르는 수면에 비가 후두둑 떨어질 때 수직/수평적 차원 모두가 움직인다. 간섭작용으로 생긴, 또 다른 물결 일부는 그 자체의 리듬을 타고 화면 위로 떠돈다. 그것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조형적 리듬을 타는 가상적 형태다. 물소리와 그 메아리는 조형적 음표를 타고 화면으로 퍼져나간다. 작품 [조용히 요란한 1,2]에서도 실제 풍경에는 부재한 타원형이 일렁이는 물그림자 위로 승천하듯 떠돈다.
서둔로155_ 360x156cm, 면천에 아크릴, 나무구조물, 2023
댓구어로 사용되는 [뜨거웠다], [차가웠다]는 한 쌍으로 보여 작동한다.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청주 스튜디오에 가서 작가와 만났던 기억과 몇 달 후 그곳에서 있을 관련 세미나 때의 추위를 예상하게 한다. 점점 중간이 없어지는 시대는 파국을 향한 속도전 속에 있다. 그의 작은 그림 두 개는 지구가 앓고 있는 극단의 시대까지 연상되는 내포적 형상이다. 심효선은 이번 전시의 주요 소재인 도림천을 2024년부터 그렸다. 매일 광명의 작업실로 관악구와 금천구 사이의 구간을 자전거를 타고 왕복했다. 바쁜 하루 일정에 늘 빠른 통과만이 목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멈춰 서자 꿈틀거리는 물이 보였다. 자연도 인공도 아닌 그곳에 대한 사회적 탐구와 그리기가 병행됐다. 그 첫 결과는 [물낯] 전이다. 매일 통과했던 도시 속 인공하천은 일상적이며 잘 안다고 믿어지는 장소지만 그로서는 총체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곳이다.
흐르는 물의 한 구역을 주시했을 때 동식물은 물론 신호등, 교각, 번호판 등이 비춰 여러 층이 울렁거리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는 건축구조나 사람은 배제하고 꿈틀거리는 부분에 관심을 가진다. 구조가 등장한다 해도 흐물거리는 형상으로 와해된다. 작가의 조사에 의하면 예전의 도림천은 판자촌이 즐비하고 하수가 그대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며 수영도 빨래도 했다는 곳이지만, 이후 도시 정비가 이루어져 이것저것 조금씩 갖춰진 테마파크같은 모습으로 변신했다. 심효선은 도림천에서 도시의 ‘비장소성’을 본다. 그는 이 사회적 주제에 대해 ‘지하철역, 시민공원, 산책로, 자전거도로는 모두에게 속하면서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장소로, 사람들은 단지 통과할 뿐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말한 비장소는 관계와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한다. 비장소는 상업주의와 관료주의의 코드에 빽빽하게 포위되고 코드로 포화된 일상적 장소다.
수원연잎밭01_캔버스에 아크릴_60.6x72.7cm, 2023
일상에서 현대를 보면서 일상성을 하나의 사회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현대는 진정한 의미의 축제와 혁명, 그리고 양식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한다. 세밀하게 코드화된 시공간에서는 균열이나 파열로부터 잠재력을 기대하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만이 불굴의 활력이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최후의 방책이 될 것이다.’(앙리 르페브르) 한국의 70-80년대 도시에만 해도 공터라는 것이 있었다. 공터는 무언가로 채워져 사라졌고 비장소가 남았지만, 완전한 비장소가 있을까. 심효진은 전시 [오늘의 장소가 어제와 같을 수 없고](2023)의 작품 해설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누구에게나 완전히 비장소로 작동하는 공간은 없고,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의 공간에 대한 인식과 상호작용을 통해 비장소로 작용하는 곳이 장소로 작동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가령 공항같이 전형적인 비장소, 요컨대 떠나고 돌아오는데 필요한 플랫폼에서 살 수 밖에 없거나 일하는 사람에게 그곳은 장소일 것이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개천은 매일의 이용자에게 매우 소중한 장소다.
작가에게도 그곳은 비장소였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장소가 됐다. 심효선은 이전 작품 [수원 연잎밭](2023)를 그리면서 장소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장소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였다. 나에게 특별한 장소성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주저앉은, 발이 묶인 장소의 이름이다. 풍경은 매혹이고 이글거리는 열망이며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실존에 의한 기록이다.’ 심효선은 최근의 전시에서도 몸적 체험을 강조한다. ‘살아 있음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기는 대상으로부터, 의미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무엇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전시에 대해 ‘그리기에 있어 대상과의 멀어짐에 대한 것이고, 전시제목은 그 대상을 소괄호로 명시함으로서 무엇에서 출발하였고 어디로 왔는가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가 도달하려는 시공간은 미지에 있다. 작품은 거듭해서 출발하며, 거듭해서 시작하는 기록이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