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덕(崔載德, 1916-?)은 경남 산청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조선미술전람회》 및 일본의 《이과전》, 《신제작파전》 등에 출품했다. 해방공간과 6·25의 혼란기에 좌파 미술단체에 참여했다가 월북한 탓에,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멀어진 작가이다. 그렇지만 ‘신미술가협회’라는 민족주의 작가 동인과 더불어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잊힐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김병기는 그의 그림을 일러 ‘두툼한 보나르(Pierre Bonnard) 같은 어리숙한 그림’이라 회고했는데, 두터운 질감, 평면적 묘사, 소박한 표현을 추구한 화가에 대해 박고석은 ‘(북의) 이중섭은 남으로 왔고 (남의) 최재덕은 북으로 갔으니 서로 비겼다’고 공언할 정도로, 그는 당대의 작가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이기도 했다.


최재덕, <허수아비>, 1948, 종이에 색연필, 10.7×10.6cm


권옥연의 구술(2010.4.15)에 의하면, 돈암동 윤자선의 집에 길진섭, 최재덕 등 대여섯 명이 모여 함께 월북하려 한다는 연통을 받고 자신이 이를 말리러 갔는데, 되려 그들이 ‘너도 함흥 출신 아니냐? 우리하고 같이 북으로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어 경복고 교사로 함께 근무하던 최재덕만 따로 불러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형님만은 절대 안 됩니다’라며 극력 만류했으나, 애처가로 이름난 그가 그렇게 인형같이 얌전하고 고운 부인까지 서울에 두고 기어이 월북했다는 것이다.


최재덕, <하얀 집의 테라스>, 1940(1948), 캔버스에 유채, 51×63.5cm


2009년 가람화랑에서 열린 《근대미술명품전II》에서는 <하얀 집의 테라스> - 《제1회 조선신미술가협회 도쿄전》(1941)에 출품된 <뜰(庭)>(1940)의 하단부가 1948년 제거되고 일부 수정된 작품이다 - 와 <어항>, 이후에는 풍서헌 소장의 <포도>, <원두막>, <숲길> 등 그의 작품 여러 점을 실견했다. 원래 <포도>와 <원두막>은 김광균 구장품으로, 동주 이용희의 소개로 이우복이 수장하게 된 것이다. 전부 한결같이 세련된 색감과 구성, 격조 있는 화격을 보여주는 명품이다. 일찍이 김광균은 최재덕의 그림에 대해 ‘대단히 독창적이고 부드러운 형상이 서려 있는 서정을 나는 이중섭과 맞먹는 것으로 생각한다. 두 사람 다 천사가 이 세상을 잠깐 다녀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최재덕, <소>, 1941, 캔버스에 유채(《신제작파전》 출품작)


<허수아비>는 필자가 본 그의 드로잉으로는 지금까지 유일한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명동백작이라 불린 소설가 이봉구의 유족으로부터 문인·화가 관련 자료를 M서림 K대표가 한꺼번에 인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시인 장만영이 자신이 운영하던 출판사 산호장에서 출간한 시집 『유년송』(1948)의 속지에 그린 것이다. 이봉구의 유품 중에는 김광균, 오장환, 최재덕, 김만형 등과 관련된 서신 및 책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당시 문인·화가들이 교류한 내력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오장환이 운영하다가 후에 박인환이 인수했던 책방 마리서사에 김광균, 이봉구, 김기림, 오장환, 장만영, 정지용, 김광주, 김수영,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 조향, 이봉래, 최재덕 등이 드나들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허수아비>는 2010년 한 경매에 첫선을 보였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2021)에 출품되었다. 가을 들녘의 평화로운 정경과 한가로운 농촌의 분위기가 얼핏 떠오르기도 하지만, 월북 후 작가로서의 예술적 자유와 정체성을 잃은 채, 당에서 요구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업밖에는 할 수 없었을 그의 처지가 마치 그림 속 허수아비나 피에로 같기도 해서, 그림을 볼 때마다 야릇하고 씁쓸한 기분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