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규, <무제>, 1957, 종이에 펜, 수채, 17.2×23.7cm
그해 11월, 혹시 새로운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들렀던 차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희귀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圭’자 서명이, 왼쪽에는 붉은 ‘圭’자 도장이 찍혀 있는 채색과 세필로 그린 정규(鄭圭, 1923-71)의 연도 미상 소품 드로잉이었다. 판화도 몇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데, 드로잉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다른 작품을 사고난 뒤라 돈이 부족했다. 한 가지 걱정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자유문학』 1957년 10·11월 합병호 표지
신사동에서 사간동으로 이전한 D화랑 P대표가 A화랑에서 이런 부류의 작품을 더러 구입해 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얼마 전에는 화분에 핀 꽃을 그린 황술조(黃述祚)의 유화 소품 한 점을 매입해 국립현대미술관 측에 매도한 적도 있어, 조금 더 결정을 미루다가는 왠지 이 그림도 거기서 곧 가져가 버릴 것 같았다. P대표는 근대미술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고 정규의 작품을 매우 좋아해 목판화 작품인 <곡예>와 송혜수(宋惠秀) 구장의 소품 도예 작품 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J대표에게 한 달 정도의 말미를 주면 값을 치르고 가져갈 터이니 무조건 작품을 팔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P대표가 A화랑을 방문해 이 작품을 매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대로 이미 작품이 팔렸다고 이야기하고 한 달을 기다려 주었기에 2002년 12월 6일, 마침내 이 작품은 내 것이 될 수 있었다.

『자유문학』 1957년 10·11월 합병호에 실린 정규의 또 다른 삽화
한참의 시간이 흐른 2019년, 4월부터 6월까지 2개월여의 기간 동안 소마미술관에서 열린 《소화(素畵)》전에 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전시 기간 중인 6월 4일, 미술사를 공부하는 A군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인으로부터 정규의 <무제>가 실린 잡지의 이미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김광섭(金珖燮)이 편집 및 발행인으로, 김용호(金容浩)가 주간으로 있던 『자유문학』1957년 10·11월 합병호에는 <무제>를 포함해 2점의 정규 드로잉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무제>가 1957년작이며, 문학지의 삽도로 쓰인 내력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작가들이 생계를 위해 잡지나 신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문학예술』이나 『현대문학』 등 다수의 문학지에 근대미술사에 이름 있는 작가들의 커트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김영덕(金永悳) 구장의 정규 판화 한 점을 더 소장하기도 했지만, 중간에 내 손을 떠나 이제는 오로지 이 드로잉 한 점만을 간직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경매에 출품된 그의 판화 한 점을 입수하려고 응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작품은 당시 낙찰자의 손을 거쳐, 지금은 내가 잘 아는 지인의 수중에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