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술조(黃述祚, 1904-39)는 구본웅(具本雄)의 유품에서 34매의 흑백 도판이 실린 작품 사진첩이 발견(1970년대 초)되기 전까지는, 또 경주 황오동의 형(황찬조) 집에서 다수의 유작이 확인(1974)되기 전까지는 실체 없이 이름만 전해지던 양화 도입기 화가였다. 생전의 신문 기사나 친우들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작품세계의 전모가 이때 드러나기 시작했고, 병풍을 배경으로 탁자에 기대앉은 여인, 연못의 수련, 정물 배경의 나부, 경주 일원의 풍경 등 다채로운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자화상>(1939), <연돌소제부>(1931) 등 개성이 잘 드러난 대표작의 경우, 아카데믹한 작풍보다는 미완인 듯 보이는 동양적 필세와 분방한 포비즘적 양상이 두드러진다. 조각적 묘법을 구사하며(고유섭), 대담한 필치와 무거운 중량이 양화계를 대표한다(김용준)는 당대의 평도 있었거니와, 향토적, 서민적 소재를 취재한 경우에도 화려함과 생동감이 넘칠 뿐 아니라, 묘하게도 고급진 분위기까지 풍긴다.


황술조, <페리클레스 상>, 1920년대, 종이에 연필, 62.3×47.8cm


<페리클레스 상>은 코린트식 투구를 머리 위로 올려 쓴 페리클레스의 모습을 묘사한 석고 데생으로 보인다. <두상>의 여백에는 이름인 ‘황술조’와 ‘午前不可動’이란 다섯 글자가 눈에 띈다. ‘오전에는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근원수필』에서 김용준(金瑢俊)은 이 구절의 뜻처럼 화가가 게으른 작화 태도를 견지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면서도, 진실하고, 침착하고, 온정 있고, 의리 있는 친구인 화가야말로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 가장 격이 높은 인물이라 극찬한다.


황술조, <두상>, 1920년대, 종이에 연필, 62×47cm


발굴된 그의 유작은 경주의 한 고물장수에게 흘러갔다가 다시 헐값에 나오는데, 대구의 모화랑과 서울의 H화랑 등을 거쳐 20여 점이 호암컬렉션으로 들어간다(이구열 「40년 만에 소생한 천재화가」 『월간중앙』 1975년 6월호 p370-375, 경주미술사연구회 수석연구원 최용대 구술). 이후 나머지 석고데생은 옛 경주박물관 맞은편에 있던 골동점 광신당(대표 주태보)으로 흘러 들어가 이리저리 흩어지고(갤러리대아 박영인 대표 구술), 수채화 <수련>(1934)을 포함한 일부 작품은 경주에서 부산으로 이사한 조카(황동근)의 손에서 주변으로 흘러나간다(최용대 구술). 당시 경주에서 전문적으로 서양화를 취급하던 화랑은 전무했는데, 광신당과 화신 표구사 그리고 불국사 앞에서 관성(冠城) 김준식(金埈植)이 운영하던 경주화랑 정도가 서양화를 일부 취급했다(박영인 구술).


황술조, <여인>(부분도, <석고상>의 후면), 1920년대, 종이에 연필, 62.3×47.8cm


미술학교 커리큘럼 상 저학년은 석고데생을, 고학년이 되면 인체데생을 하거나 인체를 모델로 유화를 그렸으므로, 제작연대는 도쿄미술학교 저학년 시기로 볼 수 있다. 발굴된 여러 점의 석고데생 중 6점을 필자가 수득했고, 이 6점 모두는 광신당을 통해 유통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기(眞器) 스님 구장품이다(1점에는 ‘1925.4’로 보이는 연기가 있음). 이 외에도 부산 K화랑 S대표에 의해 석고데생 한 점이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되었고, 그가 소장한 또 다른 석고데생 <예수 각상>은 《한국드로잉 100년》전(소마미술관, 2008)에 출품되었다. 이들은 1920년대 우리 근대미술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크게 의의가 있음은 물론, 단발머리 양장차림에 구두를 신은 여인을 그린 <여인>의 경우, 화가의 유채 작업과도 맥이 닿는, 모던하면서도 은근히 옛스런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이런 그림에서 느껴지는 우리의 근대적 분위기나 감성은 과거 백 년 전 시대상을 추체험하게 하는 색다른 감흥과 풍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