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시 지역 연계 작가 연구 II – 김점선 (중편)
아치울 마을과 김점선의 자유 선언으로의 예술
김성호(미술평론가, 성신여대 초빙교수)
IV. 작가론/작품론 – 아치울 마을과 자유 선언으로의 예술
1984년 어느 날 김점선은 작업을 통해 가족을 직접 먹여 살리겠다는 당찬 포부로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이른바 아치울 마을로 이주한다.36) 아차산에서 내려다본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화가 신영식의 작은 농가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37) 그 후 전시회 그림이 완판되면서 비로소 일명 ‘붉은 벽돌집’으로 알려진 아치울 마을의 한 전원주택으로 이사하게 된다. 붉은 벽돌집 아래채에 첫 화실을 마련하고 김점선은 새로운 물리적 환경에서 새로운 각오로 작업에 임하게 된다.
아치울 마을은 박완서가 1998년 이곳을 간헐적으로 방문해서 장자호수공원 등을 산책하면서 작품을 구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위 풍광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박완서는 훗날 이 붉은 벽돌집으로 이사와 ‘노란 집’으로 개조하고 살았다. 박완서는 이곳에서 담낭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1년 1월 22일 80세의 나이로 별세한다.38) 박완서가 집주인으로 새로 오고 이전의 거주자 김점선이 아래층에 여전히 세를 내고 살았었는지, 김점선이 이주하고 난 후 박완서가 이주해 왔는지는 현재 자료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여러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박완서의 노란 집 이전에는 붉은 벽돌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화가 김점선이 먼저 살았다는 것이다.39)
현재 이 집은 아치울 마을회관의 남동 측 인근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인근 지역에는 고급주택 및 근린생활시설 등이 혼재한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단독주택으로 대지는 99평이다. 이 집이 위치한 아치울 마을에는 ‘고(故) 박완서 작가, 화가 이성자, 한복 디자이너 허영, 배우 박해미, 가수 조성모, 박진영’ 등 많은 문화예술인이 거주했거나 살고 있어 아치울 문화마을이라고도 불린다.40)
한 기자가 인터뷰를 통해 기록하고 있듯이, 김점선에게 아치울 마을은 그가 태어났던 개성의 고향 마을 같은 풍광을 가진 곳으로 인식되었다.41) 그녀에게는 더 이상 따뜻한 심성의 할머니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고모 그리고 자애로운 큰 엄마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부단히 그녀의 속을 썩였던 남편이었지만 훗날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준 남편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말썽 없이 튼튼하게 잘 성장해 가는 아들과 함께 이룬 ‘가족’이 사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김점선은 6.25 전쟁으로 인해 다섯 살에 떠나온 개성의 고향 마을을 기억하면서 아치울 마을의 붉은 벽돌집의 정원을 꾸몄다. 마당 가득 피어난 꽃들, 그곳에 뛰어다니던 거위, 백합을 가꾸던 화장실 등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집이었던 고향 집을 재연이라도 하듯이, 김점선은 벽돌집 마당에 백합, 맨드라미 등의 꽃들을 키웠고 오리와 거위를 길렀다.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꽃들과 오리는 고향 개성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된 것이자, 아치울 마을에서의 가족과의 삶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말 또한 갓 성인이 된 시절, 아버지와의 경험이 혼성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녀가 1968년 이대에 합격하고 나서 아버지와 큰집에 인사하러 갈 때, 거리에 말을 타고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저런 모습으로 키우고 싶었다고 말해 주었던 사실을 되뇌며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말을 자신에게 선물했다고 생각한 것이 그것이다. “1968년 이대에 붙고서 아버지랑 큰집에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때 어떤 여자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거야. 그 시대 다른 양반들 같으면 여자가 앞장서 간다고 투덜댔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도 너를 저렇게 키우고 싶었다고 말했어. 그때 말이 확 나에게 다가왔지. 내가 원래 과장이 심하고 뻥튀기를 잘해. 그래도 나는 그때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말 들을 나에게 선물했다고 생각했어.”42) 그러니까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말’은 김점선의 은유적 자화상이자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기억의 표상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말은 고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사회 선생의 학창 시절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었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 선생은 미술 시간에 말을 그리라는 과제 앞에서 말을 도저히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이것은 말이다’라는 글씨를 썼다고 했다. 헛웃음을 짓고 넘어갈 만한 이야기를 김점선은 허투루 듣지 않고 마음 속 어디에 담아 두었던 것 같다. 15년의 세월이 흘러 그녀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이 기억을 떠올리곤 곧바로 집에 가서 화폭 위에 빨간색 말을 그리고, 왼손을 통해서 “이것은 말이다”와 같은 텍스트를 연필로 함께 써넣었다고 한다.43)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말에 관한 한, 고등학교 시절의 한 선생이 언급했던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갓 성인이 된 시절, 아버지와의 경험이 혼성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김점선은 사회 선생이 들려주었던 학창 시절 미술 수업 시간에 관한 에피소드를 일명 ‘다빈치 콤플렉스’라고 규정지었다. “모든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그게 왜 그런 줄 아나? 그림은 다빈치처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44) 다빈치처럼 잘 그리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과 두려움이 ‘이것은 말이다’라는 텍스트로 대신하면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그녀는 자신이 훗날 출간한 에세이집에서 이러한 ‘다빈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작업 세계관을 다음처럼 내비춘다. “자유 선언으로서의 그림, 정신을 억누르는 돌덩이를 분쇄해내는 그림, 카리스마에 반항하는 그림, 자유의 원형을 탈환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45)
자유 선언으로서의 그림, 자유의 원형을 탈환하는 그림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빈치 콤플렉스 때문에 그림 대신 텍스트로 대신했던 한 선생의 경험담을 현대미술의 장으로 가져와 역으로 그림과 텍스트가 맞물린 자유로운 미술을 주창하고 선언하는 예술적 시도와 같은 것이다. 김점선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마음을 그린다. 잘 그리려고 하지 않고, 솔직해지려고 애를 쓴다”46)고 말한 바 있다. 잘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고 잘 그리려는 무의식마저 탈주하려는 욕망 때문일까? 그녀는 때로는 훈련된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무의미한 내용을 어설프게 써나간 텍스트만으로 화폭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동화 같은 단순하고도 왜곡된 형상의 동식물 이미지만으로 화폭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접근’을 통한 텍스트는 단지 회화의 '해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위와 같은 메시지를 회화 자체의 일부로 전유한 것으로 해설할 수 있다. 즉 화면 속 텍스트 자체를 이미지로 기호화한 제스처라고 하겠다. 거기에는 의미화하기를 거부하고 의미의 덩어리 자체로 관객에게 자유롭게 해석되길 기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도 해설할 수 있겠다.
이미지 자체는 또한 어떠한가? 그녀에게서 말, 오리, 나무, 꽃, 하늘 등의 이미지는 단지 상징이나 장식이 아니라, 과거의 따스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자, 예술에 관한 내면적 고백이며, 자유로운 예술을 향한 상상력의 변형인 셈이다. 김점선은 이처럼 이미지의 규정적 의미화와 단의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여러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예술을 시도하는 창작 태도를 드러낸다.
평론가 김종근은 이러한 김점선의 창작 태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바 있다. 세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한 기획전 오프닝에서 작품 설명을 부탁한 사회자의 요청을 거칠게 거부하면서 김점선이 내던진 불평이 그것이다. “어이구, 눈깔이 있으면 보면 됐지, 이런 그림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느냐. 그냥 말이고 꽃을 그린 건데, 그걸 꼭 설명해야 아느냐. 백화점에 넥타이나 양말처럼 구경하다가 맘에 들면 사면 되는 거지.”47) 이어서 덧붙인 말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이런 오프닝엔 안 나오려 했는데, 한 달 전부터 저 여자가 안절부절못하고 그림이 안 팔릴까 봐 불안해하길래 나온 것이다.”48)
“쓰레기…” 운운하며, 오프닝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김점선의 야생마와 같은 거친 행동과 품성은 논외로 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예술 소통에 관한 생각의 단편을 엿보게 해주기에 족하다고 할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의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49)라는 언급은 미술이라는 것이 캔버스 화면의 즉물성(objecthood),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설파한 것으로 어떠한 텍스트적 이해보다 시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자, 또 한편으로는 어떠한 해석의 무용론을 피력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역으로 관람자 입장에서는 어떠한 해석도 모두 가능해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명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예술 작품은 독자와 관람자에 따라 모든 해석이 가능하다는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열린 예술작품(Opera aperta)’이나 야우스(Hans Robert Jauss)의 수용 미학(Reception Aesthetics)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에코의 입장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해석학적으로 열린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룬다.50) 야우스에게서 독자는 단순한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기대의 지평(Horizon of Expectation)을 지닌 채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이다.51)
이러한 이론들을 전시 현장에 적용하면, 미술가의 내밀한 언어로 완성된 예술작품이 전시의 현장에서 관람자들에 의해서 또 다른 언어들로 확대 재생산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김점선의 그 거친 투덜거림은 제도권 안에 전시된 예술 작품에 대한 작가의 직접 해설보다는 관객의 지각과 인식에 따른 각자의 해석이 주요할 뿐이라는 오늘날 수용론에 관한 주장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점선의 작업에서, 자유롭게 그린 꽃, 나무, 오리, 말과 같은 동식물과 같은 형상은, 한편으로는 고향 개성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처럼 과거 체험이 깊이 각인된 것인 동시에 현재를 사는 아치울 마을에서 가족과의 삶을 투영하고 반영한 것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단일한 의미 짓기’에 반대하고 여러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예술 소통을 갈망하는 상상의 메타포라고 해설할 수 있겠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