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쌓아 만든, 집 또는 바람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어떻게 가벼운 것에 묵직한 감정이나 깊이 있는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작가 안진영은 장지 위에 중성 잉크로 가느다란 선(線)을 쌓아나가는 회화를 통해서 이러한 조형 실험을 거듭한다. 그것은 하얀 바탕 위에 정성스럽게 하나둘 선을 그어가면서 어떠한 형상을 만드는 창작의 과정이자, 그녀가 염원하는 어떠한 소망과 꿈을 향한 느릿하지만 간절한 행보이기도 하다. 
작은 것들이 만드는 세상! ‘선’이라는 미시적 조형 요소가 성취하는 그것은 느슨한 선들이 만드는 유연한 바람이나 구름, 연기처럼 뭉쳤다 사라지는 것이거나 선들이 빼곡히 쌓인 짙은 시간의 어둠이기도 하다. 또는 어둠을 밝히는 작은 불빛이거나 뜨거운 불덩어리의 일렁임처럼 비정형의 운동을 지속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고 가느다란 선들은 안진영의 회화 안에서 꼼지락거리거나 꿈틀거리면서 저마다의 미시적 서사를 써나가거나 한데 뭉쳐 오래전 신화와 미지의 환상 세계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안진영의 회화 속 ‘작고 가느다란 선’은 바람, 비, 빛, 어둠과 같은 생태적 자연 속에서 걸어 나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유영하다가 생성 소멸하는 자연의 섭리로 되돌아가는 존재라고 하겠다.  
안진영은 자신의 작업을 대략 ‘따뜻한 검정’, ‘공들인 것에 들어있는 것’, ‘바람이 이고 온 것들’과 같은 세 가지 테마로 정리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먼저 ‘따뜻한 검정’이라는 테마에 해당하는 작품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안진영은 마치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만들어 가듯이 장지 위에 중성 펜으로 가느다랗고 짧은 선들을 느릿하게 쌓아나간다. 그녀의 선을 통한 작업은,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대기를 형상으로 포착하려는 움직임처럼 무모하지만, 어느덧 흐릿한 경계 속에서 대기와 바람을 나누고 하늘과 땅을 나누며, 어둠과 빛을 나눈다. 그것은 작은 선이 만나 이룬 드로잉이자, 드로잉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룬 복잡다기한 회화의 세상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나무, 동물, 별, 태양이 자리하거나 바람, 연기, 물, 불, 빛, 어둠이 부유하기도 한다. 
작품, 〈어둠이 양보한 거일 수도〉(2023)에서는 어스름이 짙어지는 밤하늘 혹은 그것이 걷히는 새벽녘 하늘 위에 거대한 휘장이 마치 구름처럼 떠다니는 형상을 선보인다. 혹자에게 그것은 움직이는 대기나 성단(cluster), 성운(nebula) 혹은 거대한 은하수처럼 보이거나, 또 다른 이에게 그것은 하늘을 지나는 거대한 물줄기 혹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포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명에서처럼, 어둠이 양보한 것은 무엇인가? 장지 패널의 앞면과 옆면이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는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별의 도상이 세로로 줄지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패널 측면에는 “어둠이 양보한 거일 수도”라고 하는 텍스트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다. 작품명이기도 한 그것은 마치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해설하는 시적 문장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생각해 보자. 어둠은 늘 빛과 밀고 당기는 존재다.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신이 악을 만들지 않았다”는 ‘선(善)의 신학’을 고안하기 위해서 ‘빛(선)이 도달하지 못하는 희미한 곳에서 어둠(악)이 자라는 것’으로 비유한다. 빛이 어둠을 밀치고 어둠이 빛을 밀어내는 것처럼, 현실계의 이항 대립적 존재들은 많은 부분 경계의 영역을 이동하면서 변화를 지속한다. 빛과 어둠은 반대항에 있는 상극이 아니라 경계를 서로 밀어내는 존재인 셈이다. 
안진영은 빛과 어둠을 서로 밀어내는 한 쌍으로 인식하면서도 어둠을 악이 아닌 선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회화 속 어둠은 음울하고 불편한 네거티브 존재로서가 아니라 ‘따뜻한 검정’이나 ‘양보하는 어둠’처럼 감정을 듬뿍 실은 선한 포지티브 존재다. 밤바다 위에 인공조명이 가득히 비추는 작품 〈잠시 머물다 가는 빛들〉(2023)이나 건물로 에워싼 어두운 공간을 수많은 조명등이 비추는 작품 〈노란 불빛〉(2024)에서처럼, 어둠의 강도가 더할수록 빛은 마치 별처럼 더 선명해진다. 빛을 위한 어둠의 양보 때문이리라. 그렇다. 그녀에게 어둠이란 따뜻한 검정이자 묵묵한 울림이며,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선한 어둠이다. 
두 번째로, ‘공들인 거에 들어있는 것’이라는 테마에 해당하는 작품을 살펴보자. 
이 테마는 작품 <선을 쌓아 만든 집>(2024)에서 잘 드러난다. 라이싱지에 에칭 기법으로 만든 이 판화 작품은 삼각 지붕을 이고 있는, 두 측면이 비워진 오면체의 상자 안에 구름처럼 보이는 형상이 떠 있는 그림이다. 가느다란 선들을 집적해서 상자집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가느다란 선으로 느릿하지만 공들여 쌓아 올린 작가의 수고스러운 노동을 상기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공들인 거에 들어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작은 선을 꾹꾹 쌓아 여리고 여린 함성들을 모아 견고한 힘을 선보이려는 작가의 노동 가득한 고백이자, 그 견고한 힘들이, 작지만 강한 이 작품에 모이길 바라는 작가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업 태도나 과정은,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설레고 궁금해하고, 참고 참다가 하나의 문장으로 말하는 것과 비슷한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는 선을 무수히 중첩해 가는 이러한 작업 태도가 지닌 비유적 의미를 다음처럼 언급한다: “본인에게 가느다란 선은 순수한 감각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회화 요소다. 단순하게 긋는 의미 없는 선보다는, 한 선을 그을 때마다 마음을 담아 긋는다. 곧 잘함보다는 시간 속의 울컥함을 신뢰하며 작업을 한다.”
작품 <땅 위의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온 짙은 달의 그림자>(2024)는 안진영의 작품 속에서 ‘중첩된 선이 품은 감정’을 잘 드러낸다. 디오라마(diorama) 형식으로 박스형 프레임을 갖춘 이 작품은 짙은 어둠을 바탕으로 화면 좌우에 하늘과 땅을 잇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하고, 화면 중앙에 올빼미 형상의 문이 버티고 있는 신화적이고도 환상적인 초현실 풍경을 선보인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가느다란 선으로 된 연기 혹은 구름, 그것이 변모된 손의 형상, 손 위에 올려진 까만 새 한 마리 등 신화적 도상으로 가득한 이 작품은 중첩된 선 위에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감정의 진폭을 한껏 올려놓는다. 불안과 우울, 사랑과 은혜가 중첩된 선처럼 교차하는 복합적 감정을 말이다. 나아가 이 작품은 동판화 콜라주와 엘이디 조명을 갖추어 마치 연극무대처럼 낯설고도 신비로운 이미지에 더하여 풍성하게 해석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드러낸다. 제목처럼 “짙은 달의 그림자”란 “땅 위의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온”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선한 어둠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이고 온 것들’이라는 테마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미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작품들로 구성되었는지 살펴보자. 바람은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존재만이 아니다. 바람은 변화를 지켜볼 두려움의 대상이자, 작품 〈How to live〉(2023)에서 나무가 폭군처럼 돌변한 강풍을 맞이하듯,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 다른 작품 〈애쓰는 마음은 ‘0’이 될 수 없어〉(2024)에서처럼, 바람은 부유하는 하늘 천칭을 흔들면서 인간의 마음과 판단을 비웃는 천혜의 영민한 재판관이자, 인간의 소망을 무로 되돌리는 심술을 부리는 사악한 마술사이기도 하다. 거대한 천칭을 디오라마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랑이 가까워질 때〉(2024)에서 천칭의 ‘0’의 좌표에서 기울기가 생길 때 애쓰는 인간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안진영이 작품 〈바람이 이고 온 불씨〉(2024)나 〈바람과 함께 부는 불〉(2024)에서 거친 바람과 동반하는 불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있듯이,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던 불씨를 이고 와 거대한 덩치의 불덩어리로 키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 바람이 이고 온 것은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람은 천칭의 바늘을 균형 잡게 하려고 애쓰는 인간의 마음을 흩뜨리고, 보이지 않던 불씨를 살려내는 존재다. 작품 〈그 바람에〉(2024)는 꼬리 잘린 도마뱀을 담고 있는 가오리연을 바람 속에서 붙잡고 있는 인간 혹은 창조주의 손을 표현했는데, 이 작품 측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엇을(혹은 스스로) 보이게 만드는 바람’의 존재적 위상을 해설하는 것 같은 텍스트가 다음처럼 쓰여 있다: 그런 것, 하나뿐인 것, 광택이 없어도 빛나는 것, 이야기가 있는 것,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감이 있는. 
이러한 시어 같은 안진영의 해설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게 만드는 바람의 힘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인간의 사랑처럼, 미약한 것에서부터 창대한 무엇으로 이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게 만드는 근본적 바탕을 제공한다. 안진영의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 그리고 작업에 대한 사랑처럼 말이다. (20250228) 

출전/
김성호, 「선을 쌓아 만든, 집 또는 바람」, 『자료집』, 안진영 작가론, 영등포문화재단 비평매칭,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