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시 지역 연계 작가 연구 II – 김점선 (상편)

아치울 마을과 김점선의 자유 선언으로의 예술


김성호(미술평론가, 성신여대 초빙교수)


I. 프롤로그

이 글은 고(故) 김점선(金點善, 1948-2009)의 작품 세계를 논한다.
김점선은 1984년 이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아치울 마을’에 자리 잡고 괄목할 만한 미술 창작 활동을 펼쳐 왔고, 박완서 등 지역 문학인과의 교류를 통해 문학과의 접점을 끊임없이 모색해 왔다. 또한 그녀는 문화예술인들과의 교류 및 활동뿐만 아니라 회화, 드로잉, 일러스트, 무대미술과 같은 다양한 유형의 미술 활동 그리고 미술 에세이 및 동화 출판,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대중과의 접점을 모색하는 등 한국 화단에서 독특한 궤적을 그려 왔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 김점선은, ‘확장성 기반의 문화생태플랫폼’을 지향하는 구리시립미술관 설립을 준비하는 구리시의 입장1)에서 ‘지역 연계 작가’로서의 주요한 위상을 견지한다. 이 글은 그녀의 예술 활동과 더불어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고찰하고, 구리시립미술관의 주요 작가로서 김점선이 지닌 위상과 ‘문화생태’적 의미를 두루 탐색한다.


II. 김점선이라는 예술가 - 길들지 않는 야생마

김점선은 누구인가?

건조하게 그녀의 이력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김점선은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나 1964년 경남여고와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육공학과를 졸업한 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졸업했다. 1972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백남준·이우환의 심사로 파리 비엔날레 후보로 선발되었다. 1973년 5인전(미국문화원)과 1983년 첫 개인전(박여숙화랑) 이래, 개인전만 60여 차례 열었고,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1987년, 1988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주최 미술부문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2002년부터 디지털 판화전도 개최했다. 1998년 자서전 『나, 김점선이야』를 출간했고, 『10cm 예술』, 『김점선 스타일』,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성인용이야』 등의 그림 에세이집을 펴냈고, 그림 동화책 『앙쾡이가 온다』, 『큰 엄마』를 출간했다. 2009년에 난소암으로 작고했다.2)

조금 다르게 그녀의 이력을 정리해 볼까?

김점선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격동의 개성에서 태어나 1964년 경남여고와 1968년 당시 최첨단 학과였던 이화여대 교육공학과(현 시청각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그녀는 외국책에 중국, 일본만 언급되고 대한민국이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는 이유로, 그리고 비트 문화를 낳은 미국으로 유학 가는 목표로, 대학 재학 4년 내내 영어만 공부했다. 그녀의 발언을 들어보자. “나는 비트족이 되려고 영어 공부를 했어. 비트족이 뭔지 모르지? 비트 문명은 미국의 물질주의에 반발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해서 나왔어. 돈 버느라 헉헉거리며 살기만 하면 인생이 너무 치사하잖아. 고등학교 2학년 때 비트족을 소개하는 칼럼을 봤는데 그 칼럼으로 인생을 바꿨지. 나는 미국에 가서 비트가 될 것이다. 일생의 진로를 결정지은 거야. 근데 그때는 미국에 가려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해야 했거든. 그래서 대학 갔어, 대학 때 영어 공부만 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3) 책도 교양 국어책 외에는 한글로 된 책은 읽지 않았다고 하며, 공강 때마다 랩실에 가서 원어민 발음을 듣고 따라 하고 밤에는 AFKN을 틀어놓고 잤다고 한다.

그녀는 몇 가지 이유로 유학을 미루고 동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를 이어 나가던 중, 필수 과목 수강을 거부한 사건으로 인해 한 학기 만에 제적당하기에 이른다. 이후 모 교수의 추천으로 3년 동안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영어 통역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던 시절4), 미래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당시 통역으로 고등학교 교사 월급의 네 배나 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정작 돈을 모으지는 못한데다가,5) 1967년 대학교 4학년 때 이대학보에 응모했던 소설이 낙방한 후 계속 소설가의 꿈을 키워가며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했으나 매번 낙방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트 문화를 경도했던 미국이 히피문화로 변질한 것에 실망해 대학 4년 동안 영어 공부만 하면서 계획했던 유학을 거의 포기한 좌절의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점선은 좌절의 상황을 지속하던 27세 경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죽음 충동과 관련한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그림을 죽도록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1972년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예술 여정에 나서는데, 입학 첫해부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제1회 앙데팡당전에 응모한 그녀의 작품이 백남준·이우환의 심사로 파리비엔날레 후보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6)

놀랄 만한 일은 이어진다. 1977년 선배의 전시회에서 만난 한 남자를 보고 3초만에 결혼을 결심한 후 프러포즈를 하고 같은 해 결혼했고7) 1979년 아들을 낳았다. 갑작스런 결혼과 함께 맞닥뜨린 찢어지듯 가난한 삶 속에서도 그녀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렸다. 굶어 죽기 직전에 그림이 팔려 살았다고 한다.

김점선은 1983년 박여숙화랑에서의 첫 개인전 이래, 모노크롬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화단의 풍토에 도전하면서 자유롭고도 면모의 원색의 구상화를 통해 독자적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1984년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이주한 후에는 소설가 박완서 등 문화예술인들과의 교류를 확장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문화 예술 활동을 왕성하게 펼쳐나갔지만, 동시에 대중적 활동 탓에 화단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과 1988년대, 한국예술평론가협회는 그녀를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하며 그 반골의 정신에 박수를 보냈다. 그녀는 오십견이 찾아와 붓을 들기 힘들게 되면서, 2001년부터 컴퓨터에서 작업하고 결과물을 프린팅하는 디지털 판화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기술과 형식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나이도, 형식도, 장르도 그녀를 가두지 못했다. 그녀는 2005년부터 2년간 KBS 1TV <문화지대>에서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인물을 만나 인터뷰하는 ‘화가 김점선이 간다’ 진행자로 활동8)하기도 했다.

글도 그림만큼 자유로웠다. 1998년, 자서전 『나, 김점선이야』를 통해 세상에 자기 내면을 던졌고, 『10cm 예술』, 『김점선 스타일』, 『나는 성인용이야』 같은 책들로 자신만의 감각과 유머, 철학을 대중과 나눴다. 그뿐만 아니라 난소암 투병 중에9) 만든 『앙괭이가 온다』, 『큰 엄마』와 같은 그림동화를 통해서 아이와 어른 모두의 마음에 말을 걸었다. 2009년 투병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김점선은 마지막 자서전 『점선뎐』을 출간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강렬하고 솔직한 붓끝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말을 건다.

“나는 틀을 부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도 부숴.”

어떠한가? 기존의 이력에 화단 풍토에 저항했던 반골 기질의 이력과 그녀의 거침없는 성품을 거론하고, 결혼, 가난한 삶, 다양한 예술 활동 그리고 암 투병 중에도 작업을 이어갔던 사실 몇 개를 더 추가하니 그녀의 이력이 극적으로 변주된다.

1984년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서 첫 만남을 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온 소설가 박완서가 김점선을 두고 언급했던 ‘야생마’라는 평가는 적절해 보인다. 이이화 선생 밑에서 한문 공부를 하던 박완서가 공부 모임에 새로 들어온 김점선을 보았던 첫인상에 대한 기록이다. “점선 씨가 1984년 무렵에 한문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왔어요. 마치 야생마를 보는 것 같았지요. (중략) 점선 씨처럼 거침없이 다 말하면 사람들이 멀리하기 마련인데 저는 본래 남들이 맘에 안 들어 할 것 같은 사람을 좋아하거든요.”10)

소설가 최인호 또한 김점선의 이름을 변주하면서 야생마라는 평가를 덧붙인다. “내가 아는 김점선은 황금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야생마다. 이런 미친 말이 우리의 삶을 짓밟고 다니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광란하라, 점과 선이여. 우리의 곁에서 마음껏 춤추라.”11)

박완서의 ‘야생마’라는 평가나 최인호의 ‘황금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야생마’, ‘미친 말’이라는 평가는 결국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칭한다. 박완서는 야생마라는 말에 이어 다음처럼 말한 바 있다. “전 여태껏 점선 씨처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본래 전 누굴 길들인다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점선 씨의 야생마 같은 기질은 길들이고 싶어도 길들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12)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개성이라는 같은 고향13), 같은 하늘 아래 놓인 아치울 마을의 이웃으로서 박완서가 오랫동안 지켜본 김점선은 자신과는 극단에 있는 다른 존재였음에도 오랜 세월을 함께 가까이했던 ‘다른 듯 같은 예술가’였다.

김점선을 거론하는 평가의 말이 어디 ‘야생마’뿐이었겠는가? 박완서는 때론 “머리에 깃털만 꽂으면 영락없이 인디언 추장”이라고 했고, 때론 “꽥꽥거리면서 날뛰는 거위”로 보인다고도 했다. 혹자는 “고정관념을 거부한 자유로운 예술가”라고도 했고, 젊은 시절에 도전적인 작업을 벌이고 있는 김점선을 기억하는 이들은 “또라이, 사이코”14) 또는 “괴짜”15), “천재 화가”16)라고도 했다. 가수 조영남은 “김점선은 나보다 30배는 더 괴짜다. 내가 김점선을 극도로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탁월한 그림 외에 그 옆에만 있으면 내가 정상으로 어필되기 때문”17)이라고 했다.

김점선 화가는 다시 태어나면 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릴 때 치과 치료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거리에서 맞닥뜨렸던 오리는 “이빨도 없고 아무거나 먹고, 이도 안 닦고 그냥 자도 되고, 헤엄도 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매일 물속에서 노니까 목욕탕에 안 다녀도 되고, 급하면 날기도 하는”18) 식으로 자유를 누리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철없이 날뛰는 것 같아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에 대해 애정을 쏟는 사람”19)이자 ‘꽃이며 동물. 나무 등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김점선의 “야생마” 혹은 “길들지 않은 야생마“는 우리에게 통제 불가와 같은 부정적 의미와 평가을 강요하기보다는 관객에게 진취성과 관련한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렇다. ‘길들지 않은 야생마’! 아니, 아니다. 그녀가 암에 걸려서도 미술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의 장에서 타계하기까지 전방위로 활동을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김점선은 ‘길들지 않은 야생마’라고 하기보다, ’길들지 않는 야생마’라고 할 만하다. 그것도 ‘영원히 길들지 않는 야생마’로서 말이다.


III. 작가론/작품론 – 예술가가 되기까지, 예술가가 된 이후

이 글이 김점선이라는 작가의 예술 세계와 그 위상을 평가하는 작가론/작품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작품에 관한 미학적 분석과 비평적 해석이 필수적이지만, 그렇다고 작가의 성품과 작가를 둘러싼 결혼, 투병 생활과 같은 개인사 또한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점선의 예술 세계는 그녀만의 독특한 예술관과 특유의 성품과 기질에서 기인한 부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클린스 브룩스(Cleanth Brooks)의 신비평(New Criticism)에서는 ”작품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유기체”인 까닭에 작품론 기술에 있어서, 작품이라는 텍스트에만 집중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피력된 바 있다.20) 이 경우 작품을 창작한 작가를 중심에 둔 작가주의적 접근(Authorial approach)과 작가가 처했던 사회적 상황을 검토하는 맥락주의적 접근(Contextual approach)은 처음부터 지양될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구리시 지역 연계 작가 연구’라는 차원에서 작품론/작가론을 아우르는 이 글에서는 김점선 작품 연구에서의 작가주의적, 맥락주의적 접근은 매우 주요하다. 즉 텍스트적 비평(Textual criticism)과 컨텍스트적 비평(Contextual criticism) 양자 모두 필요하다. 텍스트적 비평이란 분석할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해설, 평가하는 일에 집중하고, 컨텍스트적 비평이란 작품 생산자인 예술가가 살아온 이력과 그 사회적 맥락을 진단하고 작품 사이의 연계성을 평가하는 일에 집중한다.21) 전자가 작품론이라면 후자는 작가론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작품론/작가론’인 이 글은 텍스트적 비평과 컨텍스트적 비평을 통해 작품 연구와 함께 작가주의적, 맥락주의적 접근을 시도한다. 즉 이 글은 김점선의 작품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일에만 집중하지 않고, 예술가 김점선의 구제적인 이력과 주변 상황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작업을 병행한다.

먼저, 질문을 던진다. 김점선은 어떻게 그림 그리기를 평생 직업으로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녀는 유년기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던 것으로 보이지만,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으로 삼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어. 6.25 전쟁이 나서 마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가 크레용하고 스케치북을 주워 왔어. 아버지가 항상 잘 그렸다. 그래서 긍지를 느끼는 거 있지. 그런 마음이 있으니까 그림을 대할 때 쭈뼛함 이런 게 없어. 자신감이 넘쳐서 늘 잘 그렸어. 근데 고등학교 때는 미술반에 들어가기가 싫었어. 젊었을 때는 머리를 써서 어느 정도 지적인 발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대학을 다니다가 학교를 관두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대학원엘 갔어.”22)

앞서 우리는 거칠게 살펴본 프로필에서 그녀가 갑자기 맞닥뜨린 죽음 충동과 관련한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그림을 죽도록 그리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어떤 죽음 충동인가?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는 삶에서 맞닥뜨린 좌절과 실의가 이끈 자살 욕망에서 기인한 무엇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살 욕망이라고? 그렇다. 관련한 일화23)를 살펴보자.

1968년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입학했던 같은 대학원에서 제적된 후 통역 일을 하면서 지내던 핍진하고 곤궁했던 26~27세 경 어느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혼을 앞둔 한 친구가 김점선에게 전화해서 ‘선을 봤으니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누군지도 모르던 놈하고 무조건 결혼하라는데 죽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자 김점선이 같이 죽자면서, 독약을 준비해 친구 여섯과 함께 동반 자살 모임을 결성한 바 있다. 이 모임 하루 전날, 죽기 전에 각자 남은 한(恨)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고 죽기로 약속했는데, 정작 그날 잠을 못 이룬 김점선은 “죽기 전에 그림을 한 번만 죽도록 그려보고 싶다”라고 하는 욕망이 솟구쳐 다음날 약속을 어기고 입시 미술학원에 등록해 데생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동반 자살 모임에 나오지 않자, 친구들 또한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 인터뷰에서 너스레를 떨던 김점선은 당시 몇 달을 죽도록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죽고 싶었던 자살 충동이 죽도록 그림만 그리고 싶은 창작 충동을 낳은 셈이다. 역설적이지만 죽음 충동이 그의 미술 입문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은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삶의 연장'이자 '자기 구원'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이후 김점선은 197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녀는 대학원을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논문 주제를 뭉크로 정해놓고 직접 노르웨이에 주문해서 도착한 뭉크 관련한 책들을 집에다 쌓아놓고 읽는 동시에 밤낮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24) 입학 첫 해 제1회 앙데팡당(Independent)전 관념미술 부문에서 파리비엔날레 후보로 선발된 이후,25) 김점선은 당시 천재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지만, 이내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다. 당시 호평을 받고 선정된 작품은 관념미술 부문에 응시했던 것으로, 흰색을 몇 번 칠해 밑판을 만든 다음, 빨간색 광택 에나멜 페인트를 부어 중력 때문에 캔버스 중앙에 비정형의 웅덩이를 만든 강렬하고도 단순한 추상 회화였다. 이 작업은 파리비엔날레에 끝내 출품되지 않았는데, 당시 비상계엄 속에서 내려진 휴교령 때문에 선정 후 후속 조치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26) 당시 관념미술 부문은 오늘날 통용되는 60년대의 개념미술(conceptul art)의 위상을 재해석하는 당시의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파리비엔날레에 선정된 작품과 달리 그녀의 후속 작업은 이러한 추상 회화의 맥을 잇는 대신 아동화처럼 단순한 형상의 동식물이나 정물을 담거나 특별한 의미 없는 커다란 글씨들을 화폭에 병치한 것들이었기에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점선이 “관념미술에 염증에 느껴 미련 없이 찬란한 무대에서 내려왔다”27)고 하면서 이러한 작업에 천착하게 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한편, 흥미롭게도, 김점선에게서 미술 창작이 한 친구의 결혼 소식이 야기한 죽음 충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 미술 창작을 지속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결혼 충동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김점선은 서른이 넘은 1977년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진정한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서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라’는 한 작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한다. “서른 넘어서까지 결혼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 그런데, 하루는 친구들과 모여 있는데, 김상유 선생님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어. 부모 돈으로 배 채우고 물감 사며 사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구역질이 날 거라고. 아기 기저귀를 빨려고 얼음물에 손 넣고, 콩나물 백원어치를 사면서도 부들부들 떨어보라고, 그런 후에도 예술이라는 게 될지 말지라고…. 조용히 듣고 있는데, 부끄러우면서도 머리 한쪽이 열리는 느낌이었어.”28) 결론은 ‘결혼하여 가족을 위해 살아보고 그런 연후에 예술을 논하라’29)라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이윽고 그녀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동력을 위해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이 사건이 있은지 한 달이 될 무렵, 결혼하고픈 욕망을 충족할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 한 선배 화실에서 가진 전시회 뒤풀이 모임 중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는 낯선 남자에게서 갑자기 결혼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3초만의 결혼 결심이라고 했다.

“노래를 듣는 순간 그만 반해버렸어. 한 소절이 끝나고 내가 ‘우리 결혼하자!’ 큰 소리로 외쳤지. 그랬더니 그 사람도 ‘좋다! 하자!’ 나만큼 큰 소리로 외치더라고. 그날 밤 여관에 갔고 일주일 후 방 하나 얻어 살림을 차렸지.”30)

그로부터 한 달 후에 결혼했다. 두 살 연하의 이혼남에 ‘백수’였던 남편과의 결혼은, 어차피 죽으려고 하다 화가가 됐고 평생 그림만 그리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한 상황에서,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둘은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함께 살았다. 결혼 2년 만인 1979년 아들을 낳았고, 아이가 백일이 지났을 무렵 남편이 몰래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해서 완전한 법적 가족이 되었다.31)

결혼은 새로운 고생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가난한 백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경제적 궁핍의 상황을 더 곤궁하게 만들었다. 결혼 초기 그녀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때 김점선은,

“첫째, 이대로 죽는다. 둘째, 도둑질한다. 그러나 도둑질은 절대 못 하고, 어차피 죽을 것이니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자”32)라고 하면서 갈등하다가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어쩌다 5만원에 그림이 팔리면, 쌀을 사고 된장을 얻어다가 산에서 풀을 뜯어서 넣어 먹었다고 한다. 또한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목재사에서 판을 사서 광목을 발라서 연필이나 좋아하는 색 하나만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33)

그러나, 비가 새는 단칸방에서 그녀에게 닥친 가난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남편이 새로운 일을 벌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빚을 떠안았다. 그러한 이유로, 친정에서 돈을 빌려 생활을 이어 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게다가 음주벽이 있는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일처럼 반복할 따름이었다.34) 그녀는 이 시절 매일 밤늦은 남편과 폭력이 동반된 부부싸움을 지속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상황이 극에 이르러 포기의 상황에 오면,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고 했던가? 남편이 가장으로서의 생계 책임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선언하고, 친정에서 돈을 빌리는 일도 어려워진 극단의 상황에서 김점선은 다음의 진술처럼 나름의 평화를 맞이한다. “어느 날 남편이 난 능력이 없나 보다, 하며 두 손을 들더라고. 친정에서 돈을 더 가져올 수도 없는 형편이 됐을 때. 그래, 좋다, 이제 내가 그림을 그려 먹고살자 하고는 서울에서 떠나 경기도 산골 마을에 들어갔지. 그곳에서 정말 굶어 죽을 뻔했어. 첫 개인전 때 그림이 팔렸는데, 그 돈을 친구에게 떼였거든. 무일푼이 되니 평화가 오더라고. 술 먹자는 남편 친구들이 얼씬도 안 하니 싸울 일이 없어진 거지.”35)

김점선이 1983년 개인전을 마치고 그림으로 돈을 벌 야무진 생각을 품은 채, 1984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로 이사 온 사건은 가족에게나 그녀의 미술 창작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사 이후 새로운 환경에서 둘은 서로에게 적응해 갔고, 남편은 부쩍 김점선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냈고 그녀의 작업 활동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물리적 공간에서 새로운 이웃과 함께 새로운 작업 세계에 천착해 나갈 수 있었던 구리시 아치울 마을이라는 물리적 장소의 변화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IV. 작가론/작품론 – 아치울 마을과 자유 선언으로의 예술

1984년 어느 날 김점선은 작업을 통해 가족을 직접 먹여 살리겠다는 당찬 포부로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이른바 아치울 마을로 이주한다.36) 아차산에서 내려다본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화가 신영식의 작은 농가와 같은 집에서 살았다.37) 그 후 전시회 그림이 완판되면서 비로소 일명 ‘붉은 벽돌집’으로 알려진 아치울 마을의 한 전원주택으로 이사하게 된다. 붉은 벽돌집 아래채에 첫 화실을 마련하고 김점선은 새로운 물리적 환경에서 새로운 각오로 작업에 임하게 된다.

아치울 마을은 박완서가 1998년 이곳을 간헐적으로 방문해서 장자호수공원 등을 산책하면서 작품을 구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위 풍광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박완서는 훗날 이 붉은 벽돌집으로 이사와 ‘노란 집’으로 개조하고 살았다. 박완서는 이곳에서 담낭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1년 1월 22일 80세의 나이로 별세한다.38) 박완서가 집주인으로 새로 오고 이전의 거주자 김점선이 아래층에 여전히 세를 내고 살았었는지, 김점선이 이주하고 난 후 박완서가 이주해 왔는지는 현재 자료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여러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박완서의 노란 집 이전에는 붉은 벽돌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화가 김점선이 먼저 살았다는 것이다.39)

현재 이 집은 아치울 마을회관의 남동 측 인근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인근 지역에는 고급주택 및 근린생활시설 등이 혼재한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단독주택으로 대지는 99평이다. 이 집이 위치한 아치울 마을에는 ‘고(故) 박완서 작가, 화가 이성자, 한복 디자이너 허영, 배우 박해미, 가수 조성모, 박진영’ 등 많은 문화예술인이 거주했거나 살고 있어 아치울 문화마을이라고도 불린다.40)

한 기자가 인터뷰를 통해 기록하고 있듯이, 김점선에게 아치울 마을은 그가 태어났던 개성의 고향 마을 같은 풍광을 가진 곳으로 인식되었다.41) 그녀에게는 더 이상 따뜻한 심성의 할머니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고모 그리고 자애로운 큰 엄마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곳에는 부단히 그녀의 속을 썩였던 남편이었지만 훗날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준 남편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말썽 없이 튼튼하게 잘 성장해 가는 아들과 함께 이룬 ‘가족’이 사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김점선은 6.25 전쟁으로 인해 다섯 살에 떠나온 개성의 고향 마을을 기억하면서 아치울 마을의 붉은 벽돌집의 정원을 꾸몄다. 마당 가득 피어난 꽃들, 그곳에 뛰어다니던 거위, 백합을 가꾸던 화장실 등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집이었던 고향 집을 재연이라도 하듯이, 김점선은 벽돌집 마당에 백합, 맨드라미 등의 꽃들을 키웠고 오리와 거위를 길렀다.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꽃들과 오리는 고향 개성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된 것이자, 아치울 마을에서의 가족과의 삶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말 또한 갓 성인이 된 시절, 아버지와의 경험이 혼성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녀가 1968년 이대에 합격하고 나서 아버지와 큰집에 인사하러 갈 때, 거리에 말을 타고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저런 모습으로 키우고 싶었다고 말해 주었던 사실을 되뇌며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말을 자신에게 선물했다고 생각한 것이 그것이다. “1968년 이대에 붙고서 아버지랑 큰집에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때 어떤 여자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거야. 그 시대 다른 양반들 같으면 여자가 앞장서 간다고 투덜댔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도 너를 저렇게 키우고 싶었다고 말했어. 그때 말이 확 나에게 다가왔지. 내가 원래 과장이 심하고 뻥튀기를 잘해. 그래도 나는 그때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말 들을 나에게 선물했다고 생각했어.”42) 그러니까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말’은 김점선의 은유적 자화상이자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기억의 표상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말은 고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사회 선생의 학창 시절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었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 선생은 미술 시간에 말을 그리라는 과제 앞에서 말을 도저히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이것은 말이다’라는 글씨를 썼다고 했다. 헛웃음을 짓고 넘어갈 만한 이야기를 김점선은 허투루 듣지 않고 마음 속 어디에 담아 두었던 것 같다. 15년의 세월이 흘러 그녀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이 기억을 떠올리곤 곧바로 집에 가서 화폭 위에 빨간색 말을 그리고, 왼손을 통해서 “이것은 말이다”와 같은 텍스트를 연필로 함께 써넣었다고 한다.43)

따라서 그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말에 관한 한, 고등학교 시절의 한 선생이 언급했던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갓 성인이 된 시절, 아버지와의 경험이 혼성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김점선은 사회 선생이 들려주었던 학창 시절 미술 수업 시간에 관한 에피소드를 일명 ‘다빈치 콤플렉스’라고 규정지었다. “모든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그게 왜 그런 줄 아나? 그림은 다빈치처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44) 다빈치처럼 잘 그리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과 두려움이 ‘이것은 말이다’라는 텍스트로 대신하면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그녀는 자신이 훗날 출간한 에세이집에서 이러한 ‘다빈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작업 세계관을 다음처럼 내비춘다. “자유 선언으로서의 그림, 정신을 억누르는 돌덩이를 분쇄해내는 그림, 카리스마에 반항하는 그림, 자유의 원형을 탈환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45)

자유 선언으로서의 그림, 자유의 원형을 탈환하는 그림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빈치 콤플렉스 때문에 그림 대신 텍스트로 대신했던 한 선생의 경험담을 현대미술의 장으로 가져와 역으로 그림과 텍스트가 맞물린 자유로운 미술을 주창하고 선언하는 예술적 시도와 같은 것이다. 김점선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마음을 그린다. 잘 그리려고 하지 않고, 솔직해지려고 애를 쓴다”46)고 말한 바 있다. 잘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고 잘 그리려는 무의식마저 탈주하려는 욕망 때문일까? 그녀는 때로는 훈련된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무의미한 내용을 어설프게 써나간 텍스트만으로 화폭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동화 같은 단순하고도 왜곡된 형상의 동식물 이미지만으로 화폭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접근’을 통한 텍스트는 단지 회화의 '해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위와 같은 메시지를 회화 자체의 일부로 전유한 것으로 해설할 수 있다. 즉 화면 속 텍스트 자체를 이미지로 기호화한 제스처라고 하겠다. 거기에는 의미화하기를 거부하고 의미의 덩어리 자체로 관객에게 자유롭게 해석되길 기대하는 작가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도 해설할 수 있겠다.

이미지 자체는 또한 어떠한가? 그녀에게서 말, 오리, 나무, 꽃, 하늘 등의 이미지는 단지 상징이나 장식이 아니라, 과거의 따스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자, 예술에 관한 내면적 고백이며, 자유로운 예술을 향한 상상력의 변형인 셈이다. 김점선은 이처럼 이미지의 규정적 의미화와 단의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여러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예술을 시도하는 창작 태도를 드러낸다.

평론가 김종근은 이러한 김점선의 창작 태도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바 있다. 세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한 기획전 오프닝에서 작품 설명을 부탁한 사회자의 요청을 거칠게 거부하면서 김점선이 내던진 불평이 그것이다. “어이구, 눈깔이 있으면 보면 됐지, 이런 그림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느냐. 그냥 말이고 꽃을 그린 건데, 그걸 꼭 설명해야 아느냐. 백화점에 넥타이나 양말처럼 구경하다가 맘에 들면 사면 되는 거지.”47) 이어서 덧붙인 말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이런 오프닝엔 안 나오려 했는데, 한 달 전부터 저 여자가 안절부절못하고 그림이 안 팔릴까 봐 불안해하길래 나온 것이다.”48)

“쓰레기…” 운운하며, 오프닝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김점선의 야생마와 같은 거친 행동과 품성은 논외로 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예술 소통에 관한 생각의 단편을 엿보게 해주기에 족하다고 할 것이다.

프랭크 스텔라의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49)라는 언급은 미술이라는 것이 캔버스 화면의 즉물성(objecthood),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설파한 것으로 어떠한 텍스트적 이해보다 시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자, 또 한편으로는 어떠한 해석의 무용론을 피력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역으로 관람자 입장에서는 어떠한 해석도 모두 가능해진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명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예술 작품은 독자와 관람자에 따라 모든 해석이 가능하다는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의 ‘열린 예술작품(Opera aperta)’이나 야우스(Hans Robert Jauss)의 수용 미학(Reception Aesthetics)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에코의 입장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해석학적으로 열린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룬다.50) 야우스에게서 독자는 단순한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기대의 지평(Horizon of Expectation)을 지닌 채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이다.51)

이러한 이론들을 전시 현장에 적용하면, 미술가의 내밀한 언어로 완성된 예술작품이 전시의 현장에서 관람자들에 의해서 또 다른 언어들로 확대 재생산되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김점선의 그 거친 투덜거림은 제도권 안에 전시된 예술 작품에 대한 작가의 직접 해설보다는 관객의 지각과 인식에 따른 각자의 해석이 주요할 뿐이라는 오늘날 수용론에 관한 주장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점선의 작업에서, 자유롭게 그린 꽃, 나무, 오리, 말과 같은 동식물과 같은 형상은, 한편으로는 고향 개성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처럼 과거 체험이 깊이 각인된 것인 동시에 현재를 사는 아치울 마을에서 가족과의 삶을 투영하고 반영한 것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단일한 의미 짓기’에 반대하고 여러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예술 소통을 갈망하는 상상의 메타포라고 해설할 수 있겠다.

(중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