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생을 던져 유물은 지켰으나, 정작 자신은 기록되지 못한 이름들.'
한국 박물관사 50년의 숭고한 그늘 아래 잊혀진 관장들을 다시 호명해 본다.
역사의 보물창고, 그 문을 열었던 외로운 개척자들
반세기가 흐르고 있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가파른 경제 성장과 근대화의 기치 아래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당시는 ‘100억 불 수출’이라는 숫자에 환호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개발의 그늘 아래서 우리가 수천 년간 이어온 삶의 흔적과 민중의 증거들은 리어카에 실려 고물상과 인사동 거리로 흩어지거나 땔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과 전쟁의 상흔을 수습하며 국립박물관 중심의 관제 문화재 정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거대한 정책의 그늘 밖에서 제각각 사재(私財)를 털어 전국 각지의 벼랑 끝에 몰린 민속품과 기록유산을 주워 모으던 외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1976년 12월 15일, 이들이 서울 중랑구 상봉동의 작은 공간(한독의약박물관)에 모여 깃발을 들어 올렸다. ‘한국민중박물관협회(韓國民衆博物館協會)’, 지금의 사단법인 한국박물관협회의 모태가 된 사립박물관인 중심 최초의 연대였다. 이 모임에는 탈속의 파격으로 민속과 선묵화를 잇던 선승부터 지방의 야전 수집가, 서지학자, 의사, 교육자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안목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세계 1등 문화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국에 1천 개의 민간박물관이 들어서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박물관을 가리켜 흔히 ‘시간의 보물창고’라 부른다. 그러나 그 창고의 문을 열기 위해 평생을 바치고, 때로는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유물을 지켜낸 개척자들의 이름은 정작 세월의 먼지 속에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박물관협회 창립 50주년(2026.12.)을 눈앞에 둔 지금, 국립 중심의 박물관 지형에 파문을 일으키며 한국 사립·민속 박물관의 기틀을 다졌으나 역사 뒤편으로 아련해진 그 시절 몇 명의 관장들과 수장가들의 발자취를 반추해 본다.
민속과 민학(民學)의 깃발을 들다: 조자용과 파격의 야전사령관들
● 조자용(趙子庸, 1926-2000) 에밀레박물관장,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초대 회장: 서울아트가이드 2014년 ‘윤태석 관장명감’ (2) 게재.
● 중광스님(重光, 1934-2002) 선화가·수집가: ‘걸레스님’이라는 파격적인 기행으로 잘 알려진 중광(속명 고창률)은 분명 한국 민속 미학의 본질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한 선화가이자 수집가였다. 1976년 민중박물관협회 창립 당시, 불교계와 사찰 성보(聖寶)의 민속적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함께했다. 궤변과 파격 뒤에 감춰진 그의 혜안은, 민속이란 문자화된 역사 너머의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 협회 초기 동력의 가장 독창적인 스펙트럼이었다.
● 진성기(秦聖麒, 1936- ) 제주민속박물관장: 서울아트가이드 2014년 10월호 ‘윤태석 관장명감’(1) 게재.
● 박종한(朴鐘漢, 1925-2012) 오민박물관장,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초대 부회장: 지리산과 남강의 물길 따라 피워낸 남도 문화의 파수꾼이자, 한국 차(茶) 문화 복원과 전통 교육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가 진주에 설립한 ‘오민(五民)박물관’은 남도 서민들의 숨결이 밴 민속품을 품은 지역 민속 연구의 산실이었다. 협회 설립 당시 서울 중심의 문화 지형 속에서 지방 사립박물관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목소리를 높였으며, 민속 문화의 지역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창립총회(1976.12.15, 한독의약박물관)(아랫줄 좌측부터) 박종한, 허동화, 노석경, 조자용, 한기택, 중광 스님, 구순섭
(윗줄 좌측부터) 윤열수, 진성기, 김만희, 조병순, 김종규, 김조형, 황규완, 김쾌정
도심의 생활 도구에서 서지(書誌)·지역 사료까지: 삶의 결을 모은 안목들
● 노석경(魯錫俓, 1913-미상) 한국민속촌박물관장: 남도의 문화재 조사와 수석, 다도(茶道), 민속품 수집에 평생을 바친 향토 사학의 선구자다. 광주 무등산 충효동 도요지 발굴을 중앙 학계에 최초로 보고하여 국립박물관의 조사(1963년, 발굴단장: 당시 최순우 미술과장)를 끌어냈으며, 사재로 모은 소장품 500여 점을 광주시에 제공하여 1963년 광주시립박물관(현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시초를 놓았다. 이후 한국민속촌박물관장을 역임하며 서민 생활 도구의 체계적 수집과 전통 다례의 정립에 헌신했다.
● 이달범(李達範) 신성민속관장: 서울 도심 한복판(을지로 4가)에서 신성(新星)이라는 이름의 식당과 여관을 운영하던 이달범은, 1960년대 후반부터 번 돈을 써가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당시 수집가들이 도자기나 고미술품에집중할 때, 그는 맷돌, 다듬잇돌, 벼루, 농기구 등 보잘것없어 보이던 서민들의 생활 도구를 사들였다. 식당 2층에 ‘신성민속관’을 열어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했던 그의 행동은, 고미술품에만 매몰되어 있던 당시 수집 문화에 ‘민중의 일상’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환기시킨 선구적 시도였다. 다소 즉흥적이기는 하였으나, 민중박물관협회 창립도 신성민속관 모임(1976.9.-10월 경)에서 구체화하였다.
● 조병순(趙炳舜, 1922-2013) 성암고서박물관장: 종이 위에 깃든 세월의 역사, 즉 한국의 기록 문화유산을 건져 올려 서지학의 전초기지를 구축한 거목이다. 평생 개인재산을 털어 흩어지던 희귀 고서와 금석문 2만여 점을 수집한 그는 1974년 국내 유일의 고서 전문박물관인 ‘성암고서박물관’을 세웠다.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본과 현존 최고(最古)의 《삼국사기》 판본, 고려 초조대장경 등 국보와 보물급 유물을 지켜냈으며, 이를 학계에 조건 없이 공개하여 한국 서지학 연구의 거대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 한기택(韓基澤, 1903-1994) 석초원/석죽원 설립자: 의학박사이자 대표적인 1세대 수석 수집가였던 한기택은, 자연이 지닌 세월과 미학을 돌에서 발견해 대중과 나누고자 했다. 1976년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국내 최초의 야외 무료 개방 수석 공원인 ‘석죽원(石竹園)’과 수석 미술관인‘석초원(石艸園)’을 설립하였으며, 동명의 소장품 도록 《석초원》을 발간하는 등 수석과 야생화, 정원석, 석조 유물이 어우러지는 종합 석정(石庭) 문화를 제시했다.
손끝으로 지켜낸 시간을 열어
이들 관장과 수장가들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동락(同樂)’이자 ‘공공성’이었다. 박물관 법령은 물론 정부의 보조금 하나 없던 시절, 사재를 털고 주변의 냉대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며 손끝으로 지켜낸 그 시간의 파편들은 결코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었다. 이들은 수집의 기쁨을 개인의 골방에 가두지 않고, 대중과 나누고자 박물관의 문을 열었으며, ‘한국민중박물관협회’라는 이름으로 더 과감한 개방으로 시민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만방에 선포했다.
오늘날 한국 박물관계가 누리고 있는 학술적 풍요와 세계적 위상의 초석은, 50년 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길에서 이 잊혀져간 관장들이 흘린 땀방울과 혜안 위에 서 있다.
50년 전, 외롭게 박물관의 깃발을 들어 올렸던 그 이름들. 이제 우리는 번듯한 박물관과 미술관의 진열장 뒤에 가려진 그들의 거친 손마디와 혜안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지켜낸 안목을 내어주어, 우리 삶의 오랜 멋을 함께 누리게 해 준 그들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