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부터 미술관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을 좋아했던 터라 여러 나라의 문화공간을 돌아보았고, 그를 사로잡은 것은 대도시의 화려한 공공미술관이 아니었다. 일본의 이름 없는 작은 지방 도시, 농촌의 한구석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존재감을 발현하며 지역민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던 개인 미술관들이었다. 그 소박하지만 진중한 문화의 파급력은 박 관장에게 깊은 부러움과 묵직한 사명감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는 왜 대도시에만 고여 있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이 문화예술의 불모지이자 인구소멸지역,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가 분명한 강화도의 한 숲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마련한 터에 박 관장은 자신의 호(號), ‘해든’을 붙였다. ‘해가 깃든 곳’이라는 그 순우리말 이름처럼, 미술관은 자연의 빛을 고스란히 머금을 수 있는 최적의 명당에 자리했다. 그는 배대용 건축가에게 “자연에 동화되는 건축물, 자연을 품을 뮤지엄”을 화두로 던졌다. 대형 거울로 마감된 미술관의 외벽은 주변의 하늘과 땅, 나무와 바람, 그리고 마당에 우뚝 선 이고르 미토라이의 조각을 고스란히 반사한다. 현실과 예술의 경계가 거울 위에서 투명하게 겹쳐지는 이 특별한 풍경은, 미술관이란 모름지기 세상과 격리된 근엄한 신전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스스럼없이 만나는 열린 공간이어야한다는 그의 깊은 인식을 시각적으로 대변해 준다.

‘2025 미술관유공 대통령표창 수상’,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2026, 국립중앙박물관)
현대미술의 안목으로 투영한 동양의 철학적 사유
박춘순의 심미안은 17년, 갤러리 경영으로 다져진 치열한 현장 감각에 뿌리를 둔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의 전시로 문을 열고 백남준 등 국내외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며 수준 높은 안목을 구축해 왔다. 하지만 그는 컬렉터로서의 직관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철학적 사유에 빠져들었고, 동양미학으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세계적인 팝아트와 서구 현대미술의 거장을 다루는 미술관장이 왜 그토록 완고한 유가(儒家) 철학과 조선의 미학에 침잠했을까. 이에 대해 박 관장은 역설적으로 현대미술을 수집하고 전시할수록, 우리의 철학의 깊은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 학문적 성찰은 서구적 시각에 갇혀 있던 현대미술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심미안의 확장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인 ‘유가(儒家)의 경외(敬畏)와 쇄락(灑落)’은 그대로 박춘순의 삶과 해든뮤지움의 공간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기둥이다. 그가 해석한 ‘경외’는 유가가 지향하는 엄숙하고 정제된 삶의 숭고함이다. 터럭 하나 틀리지 않게 정밀하게 그려낸 어진(御眞), 법도가 엄격한 종묘와 경복궁의 직선적 공간, 단아하고 반듯한 형상의 백자가 지닌 미학이 바로 경외다. 반면 ‘쇄락’은 얽매임 없는 인간 정신의 고고한 경지, 즉 관료적 삶을 지양하고 자연과 벗하고자 하는 은일(隱逸)의 미학이다. 숲속에서 낮잠을 자고, 차를 마시고, 서화에 심취하며 요산요수(樂山樂水)하는 친자연적 삶의 태도가 곧 쇄락인 것이다.
박 관장은 이 상반되어 보이는 두 미학이 해든뮤지움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실천하고 있다. 미술관의 내부, 즉 거장들의 원화와 판화를 완벽한 환경 속에서 엄격하고 내실 있게 다루는 기획과 전시는 예술을 향한 지극한 ‘경외’의 태도다. 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마주하는 거울 외벽의 정원과 숲, 자연의 계절적 변화를 소모하며 힐링을 얻는 야외 공간은 다름 아닌 ‘쇄락’의 구현이다. 그는 서양의 현대미술품을 전시하면서도 그 기저에는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내면의 성찰과 자연 합일이라는 동양적 미학의 가치를 엄연히 실천하고 있다.

해든뮤지움, '2024 한일사진작가교류전 길 위의 파롤展_전시연계 행사, 2024,
살아 움직이는 공간, 신뢰로 지어 올린 역사
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Igor MITORAJ, 1944-2014)의 『Torso di ikaro(이카루스의 토르소)』는 박 관장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직접 수집한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잊고 과한 욕심을 부리다 날개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박 관장은 고대의 완벽한 인간상을 파괴적이고 불완전한 형상으로 빚어낸 이 강렬한 조각을 미술관 거울 외벽에 비치도록 배치했다. 이는 단순한 공간 조형을 넘어, 박 관장 스스로가 평생을 지켜온 내면의 신념을 투영한 에피소드다. 그는 늘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자. 노력 없이 되는 건 없다”며 스스로를 성찰해 왔다. 말과 행동이 다른 처세를 가장 경계하며, 과한 탐욕이 가져오는 파멸의 메시지를 이카루스를 통해 다짐하곤 한다. 그의 이러한 절제와 경외의 태도는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카루스의 불완전한 토르소는 해든뮤지움의 거울 외벽을 통해 푸른 하늘과 숲의 풍경 속으로 녹아들고, 관람객들은 그 파괴된 신화의 단면을 보며 역설적으로 깊은 내면의 평화와 성찰, 즉 쇄락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박춘순 관장이 생각하는 미술관의 정의는 명료하다. 미술관은 박제된 유물을 보관하는 근엄하고 차가운 수장고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배움 그리고 삶의 울림을 제공하는 “활기차고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어야 한다. 처음 강화도에 미술관의 문을 열었을 때, “왜 이런 시골 마을에 미술관이 필요한가”라는 냉랭한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박 관장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대도시 못지않은 수준 높은 기획전을 꾸준히 여는 한편, 소외 지역 학교와 아동들을 위한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보급하며 주민들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갔다. 이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그 냉랭함은 썰물처럼 멀리 물러나게 되었다.
지금도 아름다운 생기를 뿜어내는 그의 저력은, 다름 아닌 경외와 쇄락을 넘나들며 탄탄한 동양 미학을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실천해 나가는 구도자적 뚝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다.
- 박춘순(朴春順, 1947- ) 인천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철학박사. 해든뮤지움 설립자 겸 관장, ICOM 위원. 갤러리 유로 관장·(사)한국사립미술관협회 회장·(사)한국박물관협회 부회장·국립여성사박물관 추진위원·인일여고 및 이화여대 ALPS 총동창회장, 성균관대학교 총여성동문회 초대회장 등 역임. 성균관대학교 박춘순 장학금 창립·조성(2003- ), 대통령표창(박물관·미술관 발전유공),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원로부문(한국박물관협회), 대한민국 창조경영대상, 자랑스러운 성균인상 등 수상. 「동양예술에 나타난 유가의 경외와 쇄락의 미학」 등 연구논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