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종/ 소통을 매개하는 회화, 그림은 어떻게 소통을 매개하는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장미. 화면에 장미가 빼곡하다. 빼곡하지만, 정작 장미를 쉽게 알아볼 수는 없다. 패턴화하고 양식화된 화면 속에 장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위원소(모나드)가 동어 반복되면서 패턴을 만드는 것을 모듈 구조라고 한다. 작가의 경우에는 하나의 장미가 반복 열거되면서 하나의 패턴을 만든다. 얼핏 하나의 장미 같지만 사실 똑같은 장미는 하나도 없으므로 비정형 모듈 구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잇대어진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 장미 한 송이 한 송이를 일일이 손으로 그려 넣었다. 여기서 사각형의 프레임은 아마도 존재의 집을 상징하고 존재의 방을 표상할 것이다. 그리고 프레임 안에 들어앉은 장미는 자연스레 존재를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저마다 사는 삶의 풍경(존재의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본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 위에 백자와 같은, 마주한 하트와 같은 모티브를 올려놓았다. 여기서 백자는 전통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그리고 마주한 하트는 사람 간 관계를 상징할 것이다. 그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하트다. 관계를 매개하는 사랑(하트)에서 관계에 대한 평소 작가의 인식이 읽히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배경을 지지하는 장미 역시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에 또 다른 사랑이 포개지는 인간관계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선 긋기. 선을 긋고 점을 찍는다. 알록달록한 오방색으로 선을 긋고 점을 찍는다. 여기서 선 긋기와 점 찍기는 말할 것도 없이 조형의 기본으로, 조형의 처음으로 자기를 되돌려놓는 행위라고 해도 좋다. 회화적 자기(회화적 아이덴티티)를 조형의 제로베이스 상태 위에 놓는 것이며, 일종의 현상학적 에포케(잠정적인 판단중지)를 감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새로운 시작점 위에서 자신의 회화적 갱신을 감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조형적으로 선 긋기와 점 찍기는 이처럼 회화의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의미하며, 의미론적으로는 시간 헤아리기를 의미할 수 있다. 무심하게 선을 긋고 점을 찍는 반복적이고 반무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을 무심하게 내려놓는 행위를 통해 자신에게(그리고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헤아린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 선 긋기는 길을 의미하고, 점 찍기는 머무는 삶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선 긋기와 점 찍기 속에 가고 머무는 삶의 행태며 꼴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오방색은 전통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의미하고, 알록달록한 삶의 빛깔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이런 선 긋기를 평면에 머물지 않고 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하는데, 폐가에서 수거한 서까래에 알록달록한 오방색을 입혀 공중에 매달아 설치했다. 원래 천장(어쩌면 하늘)에 속한 구조물인 만큼, 올려다보는 시선의 설정이 상호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하늘바라기(하늘을 우르르는)로 나타난 전통적인 생활철학을 표상하는 부분이 있다. 이로써 회화의 기본으로 나타난 조형 논리를 생활 현장으로 끌어들이고 확장하는 부분이 있다. 

한글 자음. 작가의 근작은 전작에 비해 심심하다. 미니멀하다. 군더더기가 없는 화면이 심플하다. 심플하면서 깊다. 화면 구성이 심플하고, 색감이 깊다. 주로 단색조로 나타난, 채도가 조절된 깊은 색감은 물론 단번에 칠해진 것은 아니다. 수도 없이 색을 칠하고 지우고 다시 칠하기를 반복해 만든(아마도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한 치열한 과정으로서, 그 자체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변증법에 비유할 수도 있을), 그렇게 수많은 색층을 쌓아 올려 만든, 아래 색이 배어나면서 중첩되는 색을 밀어 올리는, 그렇게 위아래 색이 섞이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 그런, 색층의 레이어를 예시해주고 있다. 

그렇게 배어들고 배어나는 색층의 평면만으로도 특유의 회화적 분위기를 발하고 있는 것이 색면화파의 회화적 성과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심플한 구성과 단색조의 색감이 불러일으키는 회화적 분위기가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바탕 한 형식주의 회화(어떤 의미 이전에 구성과 색채와 같은 형식 요소만으로 이미 회화라고 보는. 그렇게 추상미술을 예고한)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그동안 먹에서 아크릴로 재료와 기법이 바뀐 부분도 있지만, 크게는 작가가 원래 기초한 한국화와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바탕 한 서양화의 회화적 성과가 종합되는 부분이 있고, 그런 만큼 작가의 회화적 여정이 분기점을 맞고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특이한 것으로 일종의 이중화면이 주목된다. 하나의 화면을 위해 두 개의 프레임이 동원되는 것인데, 화면 가운데 크거나 작은 원형을, 그리고 때로 정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파내어 만든 프레임이 하나 있고, 그 프레임을 좀 더 작은 다른 프레임의 캔버스로 뒤에 덧대어 포개는 방법으로 하나의 화면을 만들었다. 하나의 화면에 두 개의 프레임이 포개진 만큼 포개진 부분에 그림자가 생기면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부분이 있고, 실제(현실에서 건너간 그림자)와 환영(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경계를 넘어 하나로 통합되는 부분이 있다. 그림자를 매개로 그림과 현실이, 환영적 현실과 감각적 현실이 상호간섭하면서 확장되는 부분이 있다. 

형식적으로 그렇고, 의미론적으로 화면 가운데 위치한 원형과 정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는 아마도 자기 내면으로 난 창을 의미할 것이고(예로부터 회화는 세상을 향해 창을 내는 행위를 의미했다), 내적 질서의 표상(자기 내면에 내적 질서의 성좌를 짓는)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정사각형의 형태는 자기 내면으로 건너가는 관문 같고, 다른 세상으로 열린 통로 같다는 생각도 든다. 회화는 세상을 향해 창을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고 했다. 실제로도 작가는 원형의 기하학적 형태 속에 때로 색채를, 더러 붓질을 부가해 감각적 현실을 연상시키는 상황 논리를 연출하는데, 청색이 하늘을, 적색이 붉게 물든 노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그렇다. 때로 흰색의 붓질이 빛의 빔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데, 청색 바탕에 세로로 지나가는 붓질이 폭포를, 가로로 누워있는 붓질이 바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재현적인 방법이 아닌, 사실상 기호라고 해도 좋을 최소한의 요소(의미소)만으로 감각적 현실을 상기하는 방법론을 작가는 구사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기호를 매개로 한 재현의 또 다른 방법론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고, 이런 암시에 힘입어 하나의 풍경을 열어놓는 방법론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 의미로 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으로 한글 자음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단색의 평면 위에 기호 같기도 하고, 추상적인 문양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패턴 같기도 한 뭔가가 꼬물거린다. 한글 자음이라고 했다. 알다시피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의미소로서 기능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림에서처럼 열거된 자음만으로는 제대로 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불완전 언어다. 아마도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그중 일부에 대해서 작가는 읽을 수도 그 의미를 알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자기만이 알고 있는 불완전 언어를, 읽을 수도 없는 반쪽 언어를 제안해놓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속뜻이라도 숨겨져 있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은 들으면서 듣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곡해해서 듣는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결코 너에게 가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너와 다만 불완전 언어를 통해서만, 반쪽 언어를 통해서만 겨우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한글 자음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은 이런 불통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시대적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여기에 혹, 그림은 하나의 완전한 의미, 결정적인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열린 회화의 알레고리를 제안해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