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라/ 불안, 불안정한 시대의 징후 혹은 증상 



고충환 | 미술평론가



지금은 휴대폰으로 대체되었지만, 가까운 과거에 시인들은 노트를 휴대하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를 시상이 달아나기 전에 붙잡아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그렇게 붙잡힌 시상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보통은 편집과 재구성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단어는 살아남고 어떤 문장은 버려진다. 그렇게 느슨하게 결정적인 의미구조의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진다. 느슨하게 결정적인 의미구조가 결정적인데,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면서 의미를 생성하고, 시인이 부여해준 맥락 속에서 의미가 결정된다. 

조형예술로 치자면, 이런 시인의 노트 그러므로 시작 노트에 가까운 것이 드로잉이다. 시처럼 느슨하게 결정적인 의미구조를 내장하고 있고, 그런 만큼 가장 시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그 자체 독립된 장르이면서, 다른 장르로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 그러므로 일종의 매개(적) 장르라고 해도 좋다. 알다시피 김기라 작가는 영상과 설치, 평면과 입체, 그리고 여기에 오브제를 넘나드는 작가다. 애초에 장르 구분이 무색한 탈장르형 작가이고, 그 유동적인 생리에 드로잉의 가변적인 생리가 부합하는 면이 있다. 

전시를 보면, 사회적 문제와 존재론적(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실존적) 관심사와 같은, 평소 작가의 인문학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 있고, 그중에는 최근 제주도 체류 경험(가파도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바탕 한 일부 작업을 포함하고 있다. 그 자체 완결된 작업도 있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로서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그림도 있다. 억압적인 현실, 운명과 저항, 삶과 죽음, 그리고 여기에 생태사회학과 인류세와 같은, 거대 담론 중심의 세대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별에게 노래하는 땅의 기억들>이라는 제목이 역사적 기억에 연유한 현실 인식을 상기시키고, 생태적 관심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내용을 보면, 무지개가 조각났다. 무지개는 희망을 상징한다. 그렇게 희망을 상징하는 무지개가 부서졌다. 누가 무지개 그러므로 희망을 부수었는가. 사람들이 녹아내리고 있다. 흥청망청한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사람들이 흘러내리고 있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흔들리는 것처럼도 보이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힘겹게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도 보이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붉은 공 위에서 광대놀음을 하고 있다. 지금 터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임계점에 이른 지구 위에서 광대춤을 추고 있다. 눈이 멀고 말 못 하는 사람도 있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사는 부조리한 사람들이다. 

좀 더 사적인 그림도 있다. 생전에 별보다 무거운 걸음을 걸었을 죽은 아버지의 거친 두 발을 그린 그림으로, 사후적인 조각을 위한 예비적인 스케치라고 했다. 좀 더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그림도 있다. 물에 잠긴 자화상이 그것으로, 작가의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작가가 그린 이 일련의 그림들에는 감각적 실재의 층위, 사회적 현실의 층위, 그리고 여기에 존재론적인 층위가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고, 은유가 그 의미론적 상관성을 매개(중재)한다. 작가는 이런 은유를 빌려 하나의 그림으로 감각적이고 사회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형식을 보면, 그림들 서너 점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낱낱의 그림들이 개별적인 의미를 내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개별적인 의미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좀 더 큰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하나의 서사를 파생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그림 간 편집과 재구성이 임의적이라는 점이다. 다른 전시에서는 다른 상황 논리를 위해 다르게 편집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작가는 배열과 배치 그러므로 맥락의 문제를 건드린다. 하나의 의미는, 하나의 서사는 배열에, 배치에, 맥락에 연동된다.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러므로 의미는 맥락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전시는 예시해주고 있다. 그 맥락(아마도 작가가 부여했을)이 불안해 보이고 불안정해 보인다. 아마도 작가의 현실 인식을, 시대 감정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