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존재를 빚는 시간, 시간을 사는 존재 




고충환 | 미술평론가


주름과 상처, 균열이 쌓인 소나무의 표면에는 지나온 시간의 깊이가 있고, 나는 그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읽어낸다. 나에게 시간은 직선적인 흐름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며, 사건과 경험이 존재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이 흔적(존재의 흔적, 삶의 흔적)을 소나무의 형상과 표면의 주름, 상처, 균열의 이미지로 치환해 작업한다. 이를 통해 (존재가 겪었을, 존재에 쌓인) 시간의 층위와 함께 변화하는 존재를 시각화한다.

- 작가 노트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칼 융은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이 소환한 존재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고,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존재의 원천이라고 해도 좋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현현하는 것인 만큼 여기서 반복 상징은 보편 상징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 박소영에게도 이런 반복 상징이 있고 보편 상징이 있는데, 소나무가 그렇고, 소나무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작가가 기억한 소나무는 원초적 자연이 그렇듯 경이로움과 두려움의 양가감정으로 다가온 것이지만, 성장한 이후에 마주한 소나무는 기억 속 소나무와는 사뭇 달랐다. 특히 소나무의 표면 그러므로 껍질에서 상처와 주름과 균열이 덕지덕지한 시간의 지층이 눈에 들어왔고, 그동안 소나무가 겪었을 삶의 흔적이 고스란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보기라도 한 것일까. 소나무는 그대로이지만(사실을 말하자면, 소나무도 항상적인 변화 속에서 저만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지만), 그동안 소나무를 보는 작가의 시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좋다. 원초적인 시각 아니면 유아론적 시각에서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시각으로의 관점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소나무에서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낀 것도 작가고, 시간으로 축적된 삶의 흔적을 본 것도 작가다. 다시 말해, 작가가 본 것은 소나무가 아니었다. 소나무를 통해 본 작가 자신이었다. 소나무에 자기를 투영해서 보고, 소나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본다는 말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 참에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작가의 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주름이 소나무의 주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나무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노인이 겪었을 삶의 흔적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존재론적(아니면 의미론적) 유비가 매개되면서 의미가 확장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소나무가 되고, 네(노인의 주름)가 되고, 존재 일반이 되는, 그렇게 의미론적 순환과 연쇄가 일어나면서 주제와 작업이 보편성을 얻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불교의 인드라망에서는 존재와 존재가 밑도 끝도 없이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 그렇게 세계 전체는 업의 망으로 연결돼 있다. 그렇게 소나무에서 존재의 시간을 보고 삶의 흔적을 보는, 자기를 보고 타자를 보는, 작가의 작업은 작가 개인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고 있었다. 

시간을 품은 존재. 시간의 결(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는 결을 가지고 있다. 물결, 바람결, 비단결, 마음결 같은. 그리고 물론 소나무에도 결은 있다. 여기서 결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고, 존재의 성정을 의미하고, 존재가 겪었을 삶의 질을 의미한다). 응축된 시간. 숨 쉬는 시간(소나무껍질을 만지면 조명이 켜지면서 은근한 불이 들어온다. 아마도 소나무가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그렇게 관객과 상호작용하고 상호소통하는 순간일 것이다). 시간의 그림자. 흔적, 시간이 남긴 자취(시간은 흐른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다. 다만 존재가 남긴 자취와 자국과 흔적으로서만 그러므로 정작 존재가 아닌 부재의 형태로서만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 뿐). 시간의 훈장(옹이 자체는 시간이 만든 상처의 산물이지만, 작가는 그 상처를 존재론적인 상처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존재를 오마주한다. 그러므로, 상처가 존재를 만든다. 하이데거라면, 상처가 존재자를 존재로 승화한다고 했을 것이다). 시간의 균열. 지혜의 시간. 박제된 세월(세월도 시간의 한 형태고, 업도 시간의 한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온통 시간이다. 주제도 시간이고 개별 작품의 제목도 시간이다. 그런 만큼 시간이 작가의 작업의 주제라고 해도 좋다.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튈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한참 동안 심화하고, 확장하고, 변주해갈 큰 주제라고 해도 좋고, 작가의 작업을 이면에서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시간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그 자체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시간에 어떻게 형태를 부여하고 숨결을 불어 넣을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이고 비 감각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고, 발터 벤야민은 먼 것이 불러일으키는 아우라(분위기)라고 불렀다. 시간이 그렇다. 특히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기억이 소환한 시간이라면 더 그렇다. 

여기서 작가는 소나무껍질에 주목한다. 소나무껍질을 보면, 갑충류의 단단한 더께도 같고, 갑옷도 같고, 각질도 같다. 소나무가 겪었을 삶의 시간이 만든 형태이고, 질감일 것이다. 소나무가 축적했을 시간의 집이고, 소나무의 삶의 질을 증명하는, 존재의 증명과도 같은 것일 터이다. 작가는 그 형태와 질감을 동판 위주의 금속판을 소재로 만드는데, 동판을 작은 조각으로 조각낸 다음, 조각조각을 층층이 쌓아 층을 쌓는 방법으로 소나무껍질을 조형한다. 그 표면 질감이 흥미로운데, 들고나는 물결이 만든 파문 같기도 한, 우연한, 비정형의 미세 주름이 그렇다.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한 레티큘레이션 기법으로, 합금판에 토치로 열을 가하면 그런 비정형의, 우연한, 주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때로 열이 과하면, 금속판이 너덜너덜해지면서 구멍이 생기는데, 불과 열을 견디고 살아남은 상처의 흔적을 상징한다고 했다. 다시, 앞서 언급한 말을 끌어오면, 상처가 존재를 만든다. 그러므로 상처가 존재를 증명하는, 상처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삶의 알레고리를 표현해놓고 있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다. 

소나무껍질이 그렇고 표면 질감이 그렇다면, 바디(소나무의 몸통)는 어떤가. 작가는 수지 성분의 소재로 소나무 몸통(속살)을 만드는데, 소나무 몸통이 꼭 사람의 몸통 같다. 아마도 하나같이 자연에 연유한 유기적인 곡선을 공유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작가는 그 몸통 위에 삼베를 덧바르고, 그 위에 옻칠 마감하는데, 전통적인 옻칠기법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했다. 내구성과 함께 특유의 발색(색감)도 염두 했을 것이다. 여기에 옻칠이 마르는 과정에서 형태 표면에 미세균열이 생기는데, 금박으로 그 균열을 메웠다. 소나무가 겪었을, 그리고 존재가 겪었을 상처를 의미한다고 했다. 상처를 금박 마감한 것은 역시 상처가 존재를 만들고, 존재를 형성시킨다는 주제 의식에 따른 것일 터이다. 그런 만큼 존재론적인 상처라고 해도 좋고, 수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영광의 상처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그렇게 조형한 소나무껍질을 제시하기도 하고, 수지 성분의 몸통을 금속으로 만든 소나무껍질로 감싸는 형태로 제안하기도 하는데, 부분적으로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소나무를 보는 것도 같고, 헐벗은 존재를 보는 것도 같고, 갑옷으로 벗은 몸을 감싸는 것도 같다.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소나무에서 자기를 보고,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을 본다. 존재가 살았을 시간을 보고, 상처를 보고, 연민을 본다.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보고, 상처를 매개로 연민(존재에 대한 연민)을 보는 작가의 작업에는 그러므로 자기 정체성(타자에 연동된) 문제와 함께 자기반성적인 부분이 있다. 작가 자신을 포함한, 혹은 작가로 대리되는, 존재가 사는 시간을, 삶의 질감을, 조형하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