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넓어진 길’,‘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묵직한 텍스트와 대형의 흰색 회화 작품 9점이 자리하고 있다. 하얀 작품들은 하얀 공간 위에서 미끄러지듯 이어져, 말없이 고요한 듯하다. 그야말로 하얀 고요함이다.

지난 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최된 전시 《로드무비:1945년 이후 한일미술》(5.14-9.27)은 1945년부터 동시대까지 이르는 한일의 미술 교류사를 살펴보며, 1975년 도쿄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의 흰색》(이하 ‘다섯 가지 흰색’)전을 조명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 5인의 작품과 전시의 의의를 뒷받침하는 아카이브로 당시 사진과 초청장 등이 출품되었고, 《다섯 가지 흰색》전은 한일 교류를 상징하는 역사적 한 장면으로서 자리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와 작품은 거대한 흐름 속으로 편입되고, 필연적으로 부차적인 정보는 생략되거나 뒤로 밀려난다. 그리고 관람객은 편집된 시대의 궤도를 자연스레 따라가게 된다.




《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 전시 전경 ⓒ 촬영 김승중


잠시 하나의 경제학 개념을 차용해 보고자 한다.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Richard H. THALER)는 어느 한 방향으로 가고자 할 때 직면하는 크고 작은 마찰을 슬러지(Sludge)라고 명명하였다. 슬러지는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요소로, 경제학에서 장애물로 설명된다. 하지만, 미술에서는 조금 다르게 작동될 수 있다.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생략된 정보들은 때로 미술사의 면면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마찰이 곧 작품과 작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전시 속에서 흰색 추상 회화들은 단일한 장면으로 읽힌다.그럼에도 흰색 회화를 그린 5명의 화가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예컨대 박서보는 아들의 한글 쓰기 연습에서 착안해 마르지 않은 유백색 물감의 표면을 연필로 긋는 ‘묘법’을 시작했다. 서승원은 어린 시절 한옥에서 접한 전통 사물을 작업 배경으로 삼았고, 그의 ‘동시성’ 연작은 오방색의 추상에서 색을 걸러내는 변화를 거친다.
이동엽은 목탁 소리에서 공명의 구조를 느끼고, 주와 객이 분리되지 않는 형상에 집중하면서 백색을 제시했다. 허황은 여관에서 하얀 베개로부터 영감을 얻어 이를 백색 작업의 모티프로 활용했다. 이들이 《다섯 가지 흰색》전에서 구현한 것은 결과적으로 모두 흰색이었지만, 그 흰색에 이르게 된 배경도, 흰색을 제시하는 과정도 제각기 상이했다.

이외에도 작가의 면모에 관한 정보는 여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 문예지 『시문학』에는 권영우가 그린 표지화가 수차례 실렸다. 박서보의 개인전 리플릿에는 사진가 임응식이 촬영한 이미지가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들은 작품과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인물을 둘러싼 관계와 시대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역사 뒤에 놓인 이야기들을 알고 난 뒤 다시 마주한 고요한 화면은 보이지 않던 간극을 드러낸다. 주변부로 밀려났던 작가의 기억, 우연한 경험, 재료에 대한 탐구는 유사해 보이는 흰색을 갈라내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하얀 고요함을 곁에 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지나쳤던 작은 마찰들을 다시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 하나의 백색으로 보이던 화면에서 다섯 개의 삶을 발견하는 일이다. 오는 가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전시 《백색: 가장 가까운 흰색》(10.7-12.31)을 통해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