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크라이나 무인 열병식 영상을 보며 낯선 장면과 마주했다. 거리를 행진하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로봇들이었다. 그러나 불편하게 다가온 것은 로봇 자체가 아니었다. 전쟁에서 인간을 대신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술은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필요할 수 있다. 더 낯설게 다가온 것은 그 장면에서 사람들의 부재였다. 행진하는 군인뿐 아니라 행렬을 거리에서 바라보는 시민들까지 화면에서 보이지 않았다.
박경근, <군대: 60만의 초상>, 2016, 싱글채널비디오, 4K, 12분 © 박경근열병식은 본래 인간의 몸을 집단의 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행사다. 군인들은 제식훈련을 통해 오와 열을 맞추고 같은 자세와 보폭을 반복한다. 국가는 개별적인 얼굴보다 정렬된 전체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박경근의 <군대: 60만의 초상>(2016)은 바로 그 지점을 바라본다. 작품에는 제식훈련 장면이 반복되지만, 카메라는 곧 개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구보하며 힘겨워하는 병사의 얼굴, 휴식 시간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군인의 손이 화면을 채운다. 같은 동작을 요구받는 순간에도 피로와 긴장, 그리움은 각자의 몸에서 드러난다.
박경근은 이 작품 이전까지 촬영된 인물의 정보가 왜곡되는 것이 두려워 인물 촬영을 기피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두려움을 넘어서고 싶었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사람을 기록하는 동시에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군대라는 거대한 제도적 이미지 뒤에 가려진 개인을 보기 위해 다시 사람에게 카메라를 향했다. 제식훈련과 편지를 쓰는 손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토 딕스, <45% 노동 가능!>, 1920, 행방불명. 드레스덴시립미술관 아카이브 소장거의 한 세기 전 오토 딕스의 <45% 노동 가능!>(1920)에서도 전쟁과 인간의 몸은 충돌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상이군인들은 의족과 목발, 바퀴와 보철장치에 의지해 거리를 행진한다. 심각하게 훼손된 인간의 삶이 ‘45% 노동 가능’이라는 행정적 수치로 환산된다. 우리는 그 상처 입은 몸을 통해 전쟁이 한 사람의 육체에 남긴 흔적과 마주한다. 원작은 현재 행방불명이며, 오늘날 우리가 이 작품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38년 《퇴폐미술》 순회전 출품작 보관소에서 촬영된 흑백 기록사진을 통해서다. 전쟁으로 훼손된 인간의 몸을 그린 원작은 사라졌고, 그 작품이 한때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기록 사진만 남았다.
박경근의 군인들은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요구 속에서도 지치고, 숨 쉬고, 편지를 쓴다. 딕스의 군인들은 전쟁기계에 의해 훼손된 몸으로 오히려 인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제 열병식에서는 그 몸 자체가 기계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더 큰 변화는 바라보는 사람마저 기록의 화면에서 사라진다는 점이다. 과거의 열병식에는 군인의 눈빛과 땀, 구경하던 아이와 노인의 표정처럼 의도하지 않은 장면도 함께 기록되었다. 반면 서두에 언급한 열병식에서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거리를 로봇이 움직였고, 그 모습은 카메라에 촬영되어 이미지로 유통되었다. 여기서는 기록이 사건을 뒤따르기보다 사건과 기록이 처음부터 하나의 장면으로 결합되어 있다.
로봇을 만들고 조종하는 사람, 그것 덕분에 살아 돌아온 사람, 그것에 의해 죽은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변화시키지만, 기록과 유통이 사건의 형식까지 규정하는 이미지 환경 속에서 후대에 남는 것은 인간의 경험보다 정렬된 기계의 장면일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기록이 현장을 앞서가는 과정에서 점차 희미해지는 인간을 다시 찾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