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엔날레의 계절이 돌아왔다. 국내에서 개최되는 각종 비엔날레 형태의 국제전이 전국적으로 20여 개를 상회하는 형편이다. 인구 규모와 미술계의 실질적 자생력에 견주어볼 때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경기도자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등 역사와 규모를 갖춘 대형 국제행사외에도 각 지자체가 지역 활성화와 문화관광을 명목으로 신설한 군소 비엔날레들이 난립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행사의 범람은 한정된 미술인력과 예산을 분산시켜 큐레이터의 한시적 고용으로 인한 신분불안과 연속적 아카이빙의 불가능이라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15회 카셀도큐멘타의 주전시장인 프리드리히시아눔
(Fridericianum)과 광장 전경, 2022 ⓒ 장동광


광주비엔날레를 위시한 대형 국제 미술행사들은 오늘날 한국 공공미술 제도가 도달한 가장 눈부신 스펙터클의 정점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거대한 파사드 뒤편에서 백색의 전시장은 매회 새롭고 경이로운 미학적 담론을 매끄럽게 토해내지만, 그 거대한 유기체를 빚어내고 지탱하는 큐레이터들의 실존은 제도의 장막 뒤로 철저히 배경화되어 있다. 베이컨의 부조리극처럼 언제 올지 모르는 구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뮈엘 베케트의 무대 위 시선처럼, 행사의 개막과 함께 일시적으로 호명되고 폐막의 기점과 동시에 소모품처럼 해체되는 한시적 고용 관행은 우리 시대 기획자들의 계약직 노동이 지닌 적나라한 자화상에 다름아니다.

미술비평의 시각에서 볼 때, 전시는 단순한 사물의 물리적 배치나 공간적 연출이 아니라 시대의 사유를 포착하고 작가와 비평가, 그리고 대중을 매개하는 고도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실천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문화재단과 지자체들은 비엔날레를 연속적인 문화적 축적이 아닌 단발성 이벤트로 바라보며, 그 기획을 담당하는 큐레이터들을 프로젝트성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목격되곤 한다. 전시 개최 직전에 급조된 팀이 단기계약으로 투입되거나, 행사가 막을 내리면 아카이브의 정비나 후속 연구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거리로 내몰리는 파편화된 시스템은 한국 큐레이토리얼의 토양을 극도로 사막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건물 전경


이러한 한시적 고용구조가 낳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아카이브와 담론 생산의 치명적인 단절에 있다. 비엔날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미학적 지평의 축적 토대여야 하지만 맥락의 연속성이 허락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매회 비엔날레는 이전 회차의 성취를 피드백 삼기보다 일회적 항해로 표류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세계 미술계의 중추인 카셀 도큐멘타나 베네치아비엔날레의 운영 토대와 비교할 때 더욱 선명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독일의 카셀 도큐멘타는 5년에 한 번 개최되는 방식을 고수하며 차기 예술감독이 선임되는 순간부터 수년 동안 전시기획팀 및 연구원들과 함께 철저한 현장 조사와 학술심포지엄 체제를 구축한다. 또한 베네치아비엔날레가 국가관 제도를 중심으로 각국의 유능한 기획자들에게 수개월 내지 수년에 걸친 안정적인 연구기반과 예산을 위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의 공공 문화재단들은 비엔날레를 지자체의 치적 사업이나 단기 성과주의 행정으로 상정하곤 한다. 생존의 불안에 시달리는 큐레이터에게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미학적 상상력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결국 비엔날레가 진정한 시대의 거울이자 미학적 성찰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화려한 스펙터클의 이면에 가려진 기획자들의 고용적 연속성을 전면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큐레이터들의 상시적이고 안정적인 고용 토대와 지속 가능한 연구체계의 확립이야말로, 카셀과 베네치아에 비견되는 한국 미술계의 진정한 비평적 도약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큐레이터쉽의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K-컬처 강국,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 큐레이터의 헛된 희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