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세로 33.5cm, 전체 가로 1469.6cm, 축 길이 33.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랫동안 선진국이라 불린 영국 런던의 미술관들, 프랑스 파리의 미술사를 장식한 거장들의 소장품들, 독일의 미술관 건축이 지닌 실험정신들,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국제미술제 등을 두루 둘러보다 보면 문득 한 가지 근원적인 의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들과 우리의 문화적 정신은 과연 어떤 사상이나 어떤 바탕에서 달라져 온 것일까.’ 대영제국의 영광을 자랑하는 브리티시박물관이나 독일 베를린의 페라가몬박물관의 소장품들은 과거 식민지시대나 세계대전 시기의 강제점유와 약탈의 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느 여름날 만난 프랑스 인상주의 거장 모네의 아름다운 지베르니 정원에서는 자연을 소유하고 편집하려는 예술적 욕망을 연못에 내려앉는 햇살 속에서 반추해 보기도 했다. 파리 에펠탑 꼭대기에서 바라본 질서정연한 야경이나 이탈리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석조건물들은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시각적 권력으로 우리의 시선을 압도하곤 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유럽중심주의가 이룩한 정신문화가 물질문화로 전환된 거대한 욕망의 궤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의 참된 깊이는 물질의 풍요나 시각적 화려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언어와 사유, 사고방식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인문학적 품격과 타인을 향한 깊은 배려에서 증명된다. 오늘날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과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적 품격의 기본은 무엇일까. 맹자는 사단(四端)을 통하여 인간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도덕성을 말한다. 곤경에 처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 겸손하고 양보하는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 그리고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그것이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바로 수오지심, 즉 ‘스스로 잘못한 일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는 청렴한 마음’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 시절에 그린 〈세한도(歲寒圖)〉는 이러한 정신이 깊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붓에 먹물을 의도적으로 적게 묻혀 거칠고 메마르게 표현하는 갈필(渴筆) 기법으로 그려진 이 한 폭의 그림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한겨울 극심한 추위 속에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낡고 빈한한 오두막집은 세상의 욕망과 세속의 잡념을 버린 탈속(脫俗)의 경지를 오롯이 보여준다. 세상의 명예나 이익 같은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때 묻지 않은 마음은 경쟁과 물질주의에 매몰된 지금의 우리 미술계와 한국 사회가 회복해야 할 정신적 경지가 아닐까.

오늘날의 현대 예술과 도시 문명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욕망의 전차를 타고 자본주의의 끝없는 차도를 질주하는 것과 같다. 빌딩은 더 높게, 소비는 더 화려하게, 소유는 더 많게 채우려는 물질적인 집착의 끝자락에서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영혼의 황폐함이다. 삶의 진정한 구원은 욕망의 질주를 가속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얻게 되는 영혼의 자유에 있다. 자연과 예술의 인위적인 경계를 허물어 평온함을 주는 독일 뒤셀도르프의 인셀홈브로히미술관(Insel Hombroich)처럼, 우리가 발을 딛는 모든 공간이 예술의 본령이 되는 기적 같은 시간은 결국 ‘비움’의 미학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을 손에 쥐려 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세한도〉의 정신을 21세기에 소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면은 쓸쓸하지만 결코 외롭지 않고, 그 중심은 비어 있지만 무엇을 굳이 더 채울 필요가 없는 충만함. 갈필의 선 속에서 고독을 직시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완벽하게 동화되는 세계가 그곳에 있다. 〈세한도〉가 보여주는 비움의 미학은 결코 화폭 안의 청고(淸高)한 선비 정신이나 과거의 역사 속에 박제화된 전통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치관이 전도되고 혼탁해진 현실의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강력하고 살아있는 실천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가 찾아온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듯이, 시대의 혼돈과 거센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인문학적 안목을 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세한도〉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잠언이다. 나는 추사 선생의 〈세한도〉에서 그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정신을, 그렇게 직조되어야 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