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좀 무시무시하다. 멀리서 조망하는 자연은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기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산이라면) 눅눅한 습기와 무성한 식물, 무수한 생명체들이 바글거리고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존재들이 엄습하거나 잔인한 살육의 현장이 전개되고 삶과 죽음이 번갈아 지속되는 혼돈의 상황과 맞닥뜨린다. 그 안에서 인간은 너무 나약하고 헐벗은, 가련한 존재가 된다. 자연은 그 자체의 엄정한 법칙 아래 반복과 순환을 거듭할 뿐이다. 자연은 여전히 미지의 것이고 냉혹한 타자이며 단연코 타협하지 않는 제 자신의 법칙 아래 조용히, 격렬하게 나아가고 사라지기를 거듭할 뿐이다. 자연 안에서 산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그저 순응하는 것이다. 인간 역시 자연이고 생명체인 이상 삶과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이내 사라질 운명을 우회할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지속해서 바꾸고 전환해 인공의 것으로 바꾸어왔지만 결코 자연을 이해하거나 정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미술이 자연을 끊임없이 재현하고자 욕망해왔으나 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자연을 인공의 것으로 약호화하고 단순화시키는 혹은 개별적인 화가 자신의 이해 아래 조금 접혀진 도상의 형태로 표상될 뿐이다. 20세기 추상회화는 재현될 수 없는 자연, 대상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고백 내지 침묵과 부정의 방식에 해당한다.
유영국, <설산>, 1973, 53×65.1cm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유영국: 산은 내안에 있다》(5.19-10.25) 전시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를 추상화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의 그림에는 우리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자연대상이 들어와 있다. 분명 산과 나무, 바다가 단순하게 압축되어 있기에 엄밀히 말해 반구상 그림이다. 구체적인 자연대상의 세부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대상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라기보다는 자연을 보다 인지 가능한 대상이 화면에 출현함과 동시에 계절의 변화와 자연에서 받은 숭고미와 기념비적인 인상이 깃든 그림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밀도 높은 색층으로 단단하게 결집되어 견고하게 화면을 포용하고 있다. 유영국은 자연풍경에 대한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감흥에 기반한 그림으로, 대상을 최대한 단순하게 마감하고 색채를 극대화한 구상과 추상의 절충주의적 그림 내지 동양의 자연관에 젖줄을 댄 일련의 그림을 추구했다. 대상에 깃든 운(韻)을 보고 신(神)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 등이 그렇다. 그는 엄청난 자연의 위용 앞에서 그것이 결코 재현되지 못한다는 예감과 대상 너머에 깃든 본질의 추구, 아울러 자신이 겪어낸 부조리한 현실 저 너머에 굳건히 자리한 자연을 표적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영국은 당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해 마음속의 순수함을 자연과 일치시키면서 나아갔다. 세속의 저편에 자리한 순수한 자연과 표상 불가능한 자연이 한 몸으로 얽혀있다. 아마도 유영국은 자연의 절대성 앞에서 초라한 인공의 기술을, 인위성의 미를 이런 방식으로 절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에게 자연은 재현하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그것은 도저히 재현될 수 없는 것이고 미지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란 고작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언어적, 개념적 한계 안에 머문다. 자연은 인간의 의도를 불가능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연은 ‘의도를 체념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은 내가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막막하고 거대한 그 무엇이다. 커다란 구멍 같은 것이다. 도저히 재현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거대하고 무지막지하고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것, ‘실재’인 것이다. 자연은 삶과 죽음을 지치지 않고 지속하며 변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불변하는 얼굴을 지녔다. 유영국은 그런 자연을 본다. 재현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절대적인 무한함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난감한 절망감이 축약된 자연 이미지를 출현시켰다. 그것이 유영국 자연의 결정(結晶)이다. 이런 시선과 태도는 정직하다. 유영국의 자연이 힘을 갖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