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창배, <무제>, 1989, 한지에 혼합재료, 124×176cm


전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괴산의 그림쟁이 황창배》전시(6.5-7.12)를 보았다. 오래된 공장건물을 간단히 손을 본, 다소 어둑한 전시공간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적지 않은 수의 그림을 새삼 접했다. 많이 보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불쑥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림은 늘상 신중하고 조심스레, 찬찬히 보아야만 한다. 성급히 서두르면 낭패다. 이는 그림 감상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전주까지 내려와서 황창배(1947-2001)의 그림을 다시 본다. 그가 죽은 지 25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전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기이하다. 죽은 이는 항상 나보다 어른이었던 순간으로 영원하다. 그러니 내가 30대에 만난 50대의 황창배 모습은 여전히 진행형으로 멈춰있다. 나는 우연히 그가 작고하기 전 아산병원 복도에서 휠체어에 앉은 그이의 모습을 접했다. 날짜도 시간도, 그날의 날씨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지만 환자복을 입은 그이의 온화한 미소만은 순간 동결되어 있다. 이후 그를 기리는 여러 전시가 있었다. 너무 쉽게 망각될까봐, 이내 사라질까 봐 혹은 더 평가받아야 하고 그의 가치가 더 인정받아야만 한다는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서서히 사라지고 종내 아무도 없다면- 물론 기록에 의해서는 존재하겠지만-그이는 완전히 죽은 것이 된다. 

생각해 보면 지금 화단에서 황창배에 대한 평가는 살아있을 때의 환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80, 90년대 황창배의 영향은 엄청난 편이었다. 황창배 신드롬이 일어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이에 견줄만한 재능과 감각, 성과와 결실을 보여준 동양화가는 매우 드물다는 생각이다. 화가들이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는 편이지만 사실 그런 작가는 극소수다. 아니, 재능이 있어도 뛰어난 그림을 남기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재주만 앞서는 가벼운 그림이 많거나 거창한 의미를 갑옷처럼 두르는 사기성 농후한 그림이 상당수이거나 도상이나 상징의 체계에 길들여진 키치화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황창배의 경우는 화가로서 손의 놀림이 빠르고 정확하고 그림을 대하는 태도, 사고가 유연하며 모든 재료를 다루는 솜씨가 현란하다. 기존의 관습적인 회화 영역을 밀어붙이는 힘도 제한이 없다. 더구나 전각, 서예 등도 탁월해서 이 모든 것들이 한 화면에 융합되어 종횡무진 밀고 나가는 기운이 볼만하다. 황창배는 먹과 채색을 두루 혼합하고 중심적인 화면구성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회화이지 구상과 추상, 번짐과 여백, 선과 면, 색채와 질감처리, 그림과 문자 등을 한 화면에 공존시키면서 동양화의 확장된 방법론을 실현해 나갔다. 특히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독창성과 혼으로 넘치고 있는 민화에서 영감을 차용해 한국인의 일종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낸 그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 민화의 건강한 생명력과 조선 초상화의 비상한 정신주의, 고려 불화의 진채수법이나 몰골선과 백묘준이 통합된 형상, 문자의 기입과 단기연호의 사용 등으로 혼재된 화면은 수묵화와 채색화에서 볼 수 있는 감각적인 측면을 모두 흡수해 낸 그림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그의 그림은 유례가 없는 어느 차원을 풍요롭게 보여준 편이다. 그가 죽은 지도 오래되어 가지만 아직 그만한 작가를 접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풍곡 성재휴, 대산 김동수와 한정수, 서정태, 권기윤, 박문종 같은 이들도 조명되어야 할 뛰어난 동양화 작가라고 생각한다. 

현재 국공립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작가 초대전의 경우 작품성이 있고 전시할 가치가 있는 작가를 엄선하고 있는지가 늘 의문이다. 물론 수많은 작가 중에서 특정인을 선별하는 문제는 여러 입장과 상황이 개입될 것이고 평가 역시 제각기 다른 입장이 있으니 이를 조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경우 국공립미술관이 선별하는 작가 선정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자리한다.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어느 작가가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그간의 작업과 어떤 변별성이 있는지 그리고 동양화의 경우 동양화 작업을 어떻게 변화, 심화, 확장시켰는지 등에 대한 세심하고 날카로운 안목과 냉정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유명세나 권위, 시장에서의 평판 등에 의존해서 이루어진다면 이는 불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