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로 이룬 틈, 존재로의 호응-권순익 작품세계의 수행적 시간성

변종필 | 서귀포공립미술관장

1. 예술가의 작품에는 철학과 가치관, 감정과 꿈, 사유와 시대 경험의 총합이 응축된다. 그렇게 응축된 작품세계는 예술가의 실존이자 본질로 해석된다. 내적 의식과 외적 경험이 ‘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형상화되고, 그 축적물은 작가의 정체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작품세계는 그의 정신과 삶의 궤적이 응결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40여 년에 걸친 수행적 조형 행위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권순익 역시 당연히 이 맥락으로 읽힌다. 화면 위에 점을 찍고 색을 쌓는다. 흙과 물감이 만들어낸 층위를 흑연으로 갈고 덧입힌다. 그 독창적인 조형 방식, 그 지난한 제작 과정에서 반복되는 신체 행위는 노동의 고통이 아닌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도(求道)의 여정이었다.

2. 권순익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세 가지 축은 「무아(無我)」, 「틈-적·연(積·硏)」, 「호응(呼應)」 이다. 자아를 비워내는 수행으로서의 「무아」, 시간과 기억이 물질의 층위와 만나는 접점에서 형성되어 정신적 이완을 상징하는 「틈」, 그리고 이 정신성이 관계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소통으로서의 「호응」이 긴밀하게 맞물린다.
무아-틈-호응은 단절된 개념이 아니다. 각 연작의 실험을 통해 하나의 유기체처럼 순환한다. 그 순환 속에서 태동하는 미적대상의 실체를 형상화하는 조형 요소는 ‘점·선·면’이다. ‘점(무아)–면(틈)–선(호응)’으로 이어온 과정은 작가의 정신과 삶의 궤적이 응결된 흔적들이다. 여기에 기와와 석묵을 다양하게 결합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설치 작업은 권순익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읽어내는 또 하나의 핵심이 된다.

3. ‘무아(無我)’는 ‘고정된 나,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는 명제다. 불변의 실체로서 ‘나’를 부정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허무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무아는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자아는 결코 홀로 고립된 실체가 아니며, 타인·사회·자연·시간·기억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매 순간 새롭게 구조화된다.
권순익의 〈無我〉와 〈틈-적·연(積·硏)〉 시리즈는 이러한 태도를 반영한 물질적 번역이다. 점을 반복적으로 찍는다. 흙과 물감의 혼합 재료를 층층이 쌓는다. 그리고 그 표면을 흑연으로 문질러 어둡고도 은밀한 빛을 끌어낸다. 하나의 점을 찍을 때마다 사념을 내려놓고, 흑연을 문지를 때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지운다. 당연히 어제와 동일한 작품은 생성되지 않는다. 생각이 변한다. 그 변한 생각만큼 작업도 변한다. 고정된 이미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아란 결국 자아를 절대화하지 않고 세계·사물·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열어두는 태도이다.

4. 인도의 영성가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는 인간의 불행과 불안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사슬에서 비롯되는데, 이때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는 짧은 순간에 ‘틈’이 생긴다고 응시했다. 그 아주 짧은 ‘생각의 틈’에 머물 때 인간은 진정한 내면의 고요와 깨달음을 얻는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기, 현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생각과 생각의 틈 속에 온전히 몰입하는 ‘무심(無心)’의 상태를 그는 삶으로 실천했다.
라즈니쉬의 철학은 권순익의 정신적, 내면적 토대를 이룬다. 2007년, 작가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자마자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낯선 이질적인 풍경을 기록하겠다고 단단히 벼르던 마음이 황망하던 찰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오쇼의 『틈』을 읽으며 심경의 변화를 겪었노라고 고백 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영원으로 통하는 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라고 적힌 『틈』의 첫 문장은 시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 말이다. '이미 지나간 기억의 과거'나 ' 아직 오지 않은 상상의 미래'보다 진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현재(Present)’뿐 임을 깨우친다. 권순익에게 이 말은 새로운 풍경을 ‘카메라(기록과 집착)’에 담으려던 욕심을 내려놓으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를 바라보는 눈’을 뜨게 했다.
권순익의 ‘틈’에 대한 철학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과 무아(無我)와 궤를 같이한다. 불교의 ‘무아론’, 즉 무아(無我)와 무심(無心)은 고정불변한 ‘나’라는 실체가 없음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비움’의 행위를 통해 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생각을 비워낸 ‘틈’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불교에서 공(空)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니라, 무엇이든 채워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듯이 ‘틈’은 마음을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몸과 마음, 영혼이 결합된 존재의 풍요로움을 맞이하는 ‘역설적인 충만함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권순익의 〈틈-적·연(積·硏)〉 연작은 이러한 관념적 사유를 캔버스에 고스란히 물질화한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화면 위에 물감의 층을 쌓아 올리고(積), 면과 면 사이에 길쭉하게 생겨난 공간을 의도적으로 남긴 틈은 대기에 가득 찬 물질들(달리 표현하면 삶에서 부딪히는 불안과 불만)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여유가 된다. 오쇼가 수행한 ‘생각과 생각 사이의 멈춤’에 대한 시각적 구현이다. 작가는 작업의 종착점에서 단순한 부름과 응답의 구조로서의 호응을 넘어선다. 자아를 비워내는 반복 속에서 물질과의 깊은 교감을 기다리는 특유의 태도를 갖춘다.

5. ‘무아-틈-호응’이 권순익의 작품세계를 잇는 정신적 틀이라면, 정신성을 표출하는 조형 요소는 회화의 기본 요소인 ‘점·선·면’이다. 그의 작품은 ‘점·선·면’을 기본으로 표현 대상을 단순 화하는 최소한의 조형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일찍이 세잔은 “자연은 구·원추·원기둥으로 이루 어져 있다”고 선언하며 자연의 구조를 기하학적 본질로 해석했다. 그건 권순익도 마찬가지여서 “원은 하늘, 사각은 땅, 삼각형은 사람을 상징한다”고 규정한다. 자연(天·地)과 사람(人)의 조화로운 공존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삶의 형태라는 세계관의 조형적 선언이리라.
칸딘스키가 점·선·면 각각의 크기·방향·위치에 따라 측정 가능한 ‘내적 울림’이 존재한다고 피력했듯이 권순익의 점·선·면도 저마다의 크기·방향·위치에 따라 고유한 내적 울림을 지닌다. 그 울림의 총체는 작가의 조형 세계를 이룬다. 권순익은 평면에 머물지 않는다. 입체적인 물질성의 배열을 통해 회화의 영토를 확장한다.

6. 권순익의 작품은 유년 시절, 경북 문경 폐광촌의 검은 땅에서 마주한 빛의 기억, 그리고 흑연의 깊은 광택이라는 감각적 근원에서 기원한다. 흑연은 단순히 어둠을 채색하는 재료가 아니라 빛을 발생시키는 물질이다. 권순익은 빛을 묘사하지 않는다. 흑연을 반복적으로 문질러 결이 다른 표면에 흑연 층을 생성시켜 보는 각도와 빛에 따라 빛이 스스로 발광하는 듯한 조건을 만들 뿐이다. 빛을 흡수하면서도 시선의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반짝이는 흑연은 닫힌 색이 머물지 않고 빛을 품은 열린 색으로 승화된다.
이미지에서 물질로. 권순익의 작품은 손끝의 노동이라는 장인적 수행의 축적물로 귀결하며 초현대 비물질 시대에 유난히 도드라진다. 마치 화면에 부조처럼 붙어있는 공예적 요소를 가미한 점들은 단순히 색채 효과에 머물지 않는다. 직접 가마를 지피며 한국 전통 도자인 분청도자를 수련했던 30대 젊은 날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결과. 분청도자의 추상적 문양 중에서 인화 무늬의 표현 방식을 체득한 경험은 평면 위의 점과 입체로 도드라지는 점을 서로 교차시키는 권순익 특유의 구성으로 자리 잡았다. 반복과 축적. 분청도자를 빚으며 체득한 점의 미학은 『무아』 시리즈의 근간이 되었다.
권순익의 입체적 응축물은 기와를 주재료로 삼은 설치 작업에서 다시 한번 나아간다. 작가가 제작한 흑연 기와는 건축적 기억과 삶의 흔적을 품은 표면이자 자신을 비추는 심경(心鏡) 같다. 장소와 공간, 설치 방식과 규모에 따라 작가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와를 배치한다. 벽면을 따라 설치하고, 천정에서 앞뒤로 겹쳐 흘러내리듯 설치하고, 바닥에 놓은 방식 등 그의 작품은 한번에 감지되는 확정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바라볼 때마다 다른 빛과 결을 내뿜는다. 관객의 시선, 빛의 방향, 그리고 마주하는 순간의 감정에 따라 새롭게 반응한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의 변주에도 변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으니, 그건 바로 어둠 속에도 빛은 존재한다는 깨우침이다. 비 온 뒤의 검은 기와지붕이 햇살을 받아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듯이 혹은 달빛 아래 고요히 스며든 옛 지붕처럼 흑연을 입은 표면은 어둠 속 감춰진 빛을 은은히 드러낸다. 이렇듯 흑연의 물질성과 빛의 감각을 통해 구축된 상징의 체계는 단순히 시각적 표면에 머물지 않고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송두리째 뒤흔든 ‘틈’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수렴된다.

7. 권순익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화면에 녹여내지만, 자신의 서사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이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투영하고, 그 안에서 잠시나마 내면의 깊이를 들여다볼 때까지 묵묵히 기다린다. 그리하여 권순익의 회화는 완성된 이미지라기보다 열린 감응의 장으로 펼쳐진다. 객관적 물(物)과 주관적 아(我)가 분리되지 않는 물아일체로 승화하여 보는 이와 공명을 시도한다. 제작 과정의 고단함이 오롯이 함축된 작품과 교감하며 관객들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갱신되는 특별한 감상의 경험에 내던져진다. 관객의 호응 속에서 작가의 수행적 흔적이 축적된 작품은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매일 다른 빛과 감정으로 재부팅 되어 현재의 감각과 호응한다. 권순익의 작품이 지닌 특별함이다.

8. 권순익의 작품은 비움, 축적, 연마를 반복한 시간의 미학이다. 시간의 미학은 무아(점)-틈 (면)-호응(선)을 통해 축적된다.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이 저마다 기억과 감정을 투영할 때까지 권순익의 작품은 고요히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의 ‘틈’ 속에서 권순익의 작품은 미술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는지 헤아릴 수 없는, 그러나 잠시나마 멈춰 느낄 수 있는 ‘현재’라는 시간이 된다.